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안과의사 김희수의 눈과 마음과 세상] <2> "공주서 公醫로 활동한 맏형이 나의 의대 진학에 큰 영향"
알림

[안과의사 김희수의 눈과 마음과 세상] <2> "공주서 公醫로 활동한 맏형이 나의 의대 진학에 큰 영향"

입력
2007.10.16 00:05
0 0

설이나 추석이 되면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는다. 지난 추석 연휴에도 4,600만명이 고향이나 친척집을 찾았다고 한다. 차량 가득 찬 고속도로에서 고행하듯 고향을 찾는 것을 보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향을 지척에 둔 것은 물론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으니 말이다. 고향은 있으나 태어난 집이 보존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집은 지금도 학자들이 조선시대의 주거양식을 연구한다면서 찾아오곤 한다.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 있는 이 집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가옥으로 동편에 안채가 배치돼 있고 내실과 대청, 중간 방, 안방, 윗방 순서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에는 3칸짜리 방 세 개가 길게 이어져 있다. 대청에 사당까지 모신 제법 규모가 큰 집이다. 나는 광산 김씨 38세손으로 이 집에서 1928년 7월 9일 아버님 죽헌(竹軒) 영철공(永喆公)과 어머님 전의(全義) 이 씨의 4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집안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10대조 때였으니 약 350년을 대물림하며 살아온 셈이다. 동과 서, 그리고 북쪽 3면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은 들판으로 트였으며 들판을 가로질러 황산벌의 젖줄인 인내(仁川)가 흘러 풍광이 아름답다. 세월이 흘러도 산천은 유구하다는 말처럼 그곳은 언제나 내게 고향의 포근함과 먼저 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게 한다.

어릴 적의 가세는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님은 농한기에는 왕골 공예품이나 가마니를 짰고 축산에도 손대고 심지어 고무신 장사도 하셨다. 어머님도 가족과 일꾼의 식사 준비를 비롯해 잡다한 살림을 챙기시느라 하루 종일 앉아계실 틈조차 없었다.

맏형인 승수 형님은 나보다 18세나 위라 부모님이나 다름없었다. 독학으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돼 일제 때 공주 이인면의 공의(公醫)로 부임했다. 마을에서는 입지전적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후에 논산과 익산 금마면에서 개업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서울 개봉동에 ‘만수의원’을 개원, 은퇴하실 때까지 환자들을 돌보셨다. 내가 의과대학에 진학하는 데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승수 형님은 83세 때 타계하셨다.

둘째 명수 형님은 예산농업학교를 나와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에 취직하였다가 8ㆍ15해방 후 서울 용산 문배동에 있는 철도관사에서 살면서 미군정 후생부에서 일하셨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1남3녀 중 장녀만 남긴 채 전 가족이 참사를 당했다. 나는 세브란스의대를 다닐 때 둘째 형님 집에 살면서 통학을 했다. 전쟁 직전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둘째 형님과 함께 있었더라면 나도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둘째 형님의 일은 우리 집안의 커다란 비극이요 아픔이었다.

내가 양촌초등학교(당시는 소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6년이었다. 나무에 병충해가 심하면 우리들에게 나방과 송충이를 잡아오라고 해 마리 수에 따라 점수를 따고, 퇴비증산을 명목으로 풀을 베 짊어지고 등교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제의 침탈로 나라를 잃고 온 국민이 암울하고 비참한 운명에 처했던 시절이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다음해인 1942년 공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는 중학교만 가도 유학으로 생각했다. 번쩍거리는 금단추를 단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쓰고 집에 가면 이웃에서 몰려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부러워했기에 우쭐하던 시절이었다. 공주중학교는 조경이 아름답고, 말끔하게 단장된 2층짜리 본관과 웅장한 모습의 과학관, 전교생이 들어가는 강당 등 좋은 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본격화하면서 교과과정이 대폭 개편되어 교련과 정신교육, 근로동원에 시달렸다. ‘성전(聖戰)을 완수하려면 학도들이 선봉에 서야 한다’고 몰아대면서 학교는 점점 병영으로 변해갔다. 연일 총을 메고 훈련을 받거나 출정 군인 집에서 모내기를 돕거나, 군수공장에 가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부여 신궁(神宮)터 닦기, 조치원역 군수물자 싣기, 대전비행장 부지 공사 등으로 고생하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하다.

그나마 방과 후 운동장에서 각자 취미에 맞는 운동을 하면서 몸을 풀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검도와 유도 중 하나가 필수 과목이었는데 나는 유도부에 들어가 심신을 단련했다. 행군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 지금도 대학과 병원 곳곳을 다니며 하루에 최소 1만 5,000보 이상을 거뜬히 걷는 체력을 유지하는 것이 당시 행군의 결과가 아닌가 싶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건양대 총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