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고 귀 막고 살자 마음먹어도, 전자우편이라도 왔나 확인하려 컴퓨터를 켜면 그 놈의 망한 당 대선후보 경선 뉴스를 피할 수가 없다. 대통합민주신당 말이다. '개혁세력'인지 '중도통합세력'인지 '평화세력'인지에 손톱만큼의 미련이라도 남아서 그런 게 아니다. 한나라당이 집권한들 그게 무슨 문제람, 마음 접은 지 이미 오래다.
그래도 신당의 경선놀음은 짜증스럽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내 알량한 심미안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지금 정동영 손학규 이해찬 후보의 이전투구는 윤리나 합리성의 잣대로 잴 수준이 아니다. 그건 악하다거나 틀렸다기보다 추하다.
● 손학규는 되고 이인제는 안돼?
이런 판국에 남북 정상회담 효과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부쩍 올라갔다 한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친구가 말했다. "노 대통령은 집안 말아먹은 뒤 혼자 살아남았군." 그는 노무현 정부와 범여권에 애정이 남아있는 친구다. 다른 친구 하나가 뜬금없이 말했다.
"난 이인제가 유일한 대항마라고 생각해. 손학규는 되는데 이인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봐."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딴은 그렇다. 이인제씨에 대한 유권자들의 부정적 인식은 그의 '모자란 윤리성'에, 정확히는 '경조부박'에 있는 것이지 그의 모자란 정치행정 역량에 있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으로서, 국무위원으로서, 도지사로서 그는 정-손-이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능력을 보였다. 그리고 '경조부박'에서, 정-손-이가 이인제씨에게 뒤지는 것 같지도 않다.
압도적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약체라 판단한다. 이회창씨에게 견주어서도 그렇고, 투표에서 이기고 여론조사에서 진 박근혜씨에게 견주어서도 그렇다. 그의 지난 삶에는 한국인들의 평균적 법감정과 윤리 감수성에 어긋나는 대목이 너무 많다.
유권자들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능력이지 윤리가 아니어서 이회창씨와는 다르다는 관측이 많지만, 글쎄? 상대편에 버젓한 후보가 나타나 막상 본선이 본격화하면, 사람들은 그의 '윤리'를 에워싸고 있는 괄호를 이내 풀어버릴 것이다. 그의 능력에 대한 기대도, 몇 차례 토론회를 거치면, 흔들릴 것이다. '수첩공주'라 불렸던 박근혜씨와의 토론조차 부담스러워 했던 그다.
이명박씨는 역대 대선에서 한국 보수세력이 내놓은 최약체 후보다. 여권이 실없는 개혁 수사와 근친증오적 분파주의로 제 자산을 탕진하지만 않았다면, 이번 대선은 충분히 해볼 만했을 것이다.
하기야 그래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해서 들어설 정권이 또 다른 '참여정부'라면 차라리 한나라당 정권이 나을지 모른다. 정책방향은 거기서 거기겠지만, 적어도 소란스러움과 나르시시즘은 덜할 테니 말이다.
문득 시인 K가 생각난다. K는 문단에서 내가 따르는 선배다. 정-손-이와 다 친분이 있다. 정동영 이해찬씨와는 학교 동기고, 손학규씨와는 70년대 운동권으로 얽혀 있는 모양이다. 이번 경선이 시작되기 전부터, 나는 그와의 술자리에서 더러 정-손-이의 험담을 하곤 했다. 그는 덤덤히 내 말을 듣는다.
그러다가 내가 너무 나간다 싶으면 그들을 감싼다. 사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공사 좀 구분하시라고 건방지게도 선배를 핀잔한다.
● 한나라당이래도 할 수 없지
지금 정부는 반대파 일각으로부터 운동권 정권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왔다. 큰 감투를 쓴 사람의 면면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터무니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관료에게 끌려 다니고 재벌 앞에서 떠는 정권을 운동권 정권이라 부르는 건 좀 이상하다. 제 밥그릇 빼앗긴 게 분해 '욕설'이랍시고 내지르는 소리겠지.
이 운동권 정권은 운동에 대한 헌신에서 모범적이었던 K 같은 이로 하여금 정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12월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건 K를 위해서도 좋은 일인가?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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