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과 사위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나는 거실 한가운데 영광스럽게 걸어 두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포장을 거두어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국산 라디오 제1호를 만들어 한국 전자 산업의 막을 연 주인공 김해수씨는 뒤늦게 깨달았다. 정직한 엔지니어로서 조국 근대화의 깃발 아래 앞만 보고 달렸지만, 정치는 냉혹했다.
금성사, 삼화콘덴서 등 국내의 대표적 전자ㆍ전기회사에서 기술개발의 선봉에 섰던 김해수(2005년 82세로 작고)씨가 숨을 거두기 전 딸 진주(52)씨에게 자신의 인생역정을 털어 놓았다. <아버지의 라디오> (느린걸음 발행)에는 한국 현대사의 뒤안길이 얽혀 있다. 아버지의>
부친은 근대화 시절의 스타였다.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장군이 예고도 없이 금성사의 라디오 공장에 들렀다. 당시 생산 과장이던 김씨는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는”가운데 전자공업의 중요성을 차근히 설명했다. 이후 ‘전국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가 공포되는 등 그에게 기회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산업역군으로 머물도록 하지 않았다. 이화여대 약대에 다니던 딸이 1977년 운동권이 모이던 한 교회에서 박기평이라는 노동자를 만나 노동운동에 투신한 것. 그는 <노동의 새벽> 과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당동맹) 사건’의 주인공 박노해 시인이었다. 노동의>
3남 독녀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큰 진주씨는 81년부터 5년간 구로공단에서 미싱사로 일하더니 82년 박 시인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런 자식을 두었다는 이유로 김씨는 91년 느닷없는 세무사찰과 이유 모를 과징금(1억8,000만원)처분을 받아야 했다.
진주씨는 이후 사노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91년 수감돼 4년의 수형 생활을 마쳤다. 98년 8ㆍ15 특사로 남편이 풀려날 때까지 석방 운동에 주력한 그녀는 현재 NGO 나눔문화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이윤에 눈 먼 경영진과 마찰이 잦았던 아버지는 항상 사직서를 책상 서랍 속에 써놓고 일했다”고 털어놓았다.
김씨가 만든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금성 A-501은 유족측에게도, 제조사인 금성사의 후신 LG전자에도 없다. 공개 전시중인 것은 모조품이다. 전국을 통틀어 서너 대뿐인 것으로 추정되는 진품은 현재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한편 당시 정권과 생산 현장에 반미 분위기가 팽배했다는 사실을 책은 빠뜨리지 않는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정유 공장을 세우려는 것을 반대하더니, 우리나라에 석회석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시멘트를 수입하라고 강요한다”는 등의 발언이 거침없이 쏟아지던 때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집요한 시장 개방 압력과 절묘하게 겹친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