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1월 제일은행의 주인이 사모펀드인 뉴브리지캐피탈에서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으로 바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SCB 본사 총자산(130조원)의 30%에 육박하는 제일은행을 사들였다는 것은 한국 시장에 대한 '올인'이나 다름 없었다. '단타성' 펀드와는 차원이 다른, 선진금융기법을 무장한 정통 은행자본의 상륙에 국내 은행권은 아연 긴장했다.
그 해 4월 행명을 SC제일은행으로 바꾸고 야심차게 새 출발을 한 지 2년 반. 하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다. 인수 첫 해 공격적 영업으로 자산을 16조원 가량 늘렸지만, 지난해부터는 계속 뒷걸음치며 56조원에 머물고 있다.
순익은 더욱 초라하다.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1,545억원. 자산 규모가 더 적은 한국씨티은행(3,24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올 상반기에도 시중은행 중에서 가장 낮은 1,944억원에 그쳤고, 수익성을 보여주는 총자산이익률(ROA) 역시 0.77%로 시중은행 중 유일하게 1%를 밑돌았다. SC제일은행은 이제 국내 은행권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규모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군소은행'으로 전락한 셈이다.
결국 대주주인 SCB는 최고경영자(CEO) 전격교체를 통한 충격요법을 가했다. SC제일은행은 10일 실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필 메리디스 행장을 경질하고, 데이비즈 에드워즈 스탠다드차타드그룹 기업금융 최고운영책임자를 신임 행장으로 선임했다.
SC제일은행이 이처럼 쪼그라든 가장 큰 원인은 '글로벌 스탠더드의 실패'가 꼽힌다. 말로만 토착경영을 외쳤을 뿐, 붕어빵 같은 글로벌 스탠더드만을 강요함으로써 우리나라 금융시장에 제대로 정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클러스터 매니저(CM) 제도다. 지역본부장과 지점장의 중간에 이른바 '소본부장'을 두면서 지점장은 졸지에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자동화기기(ATM) 축소도 단적인 예다. 최근 1년 새 400대 가량이 줄었다. 해외에선 지점 당 ATM기가 2대 이상 있는 사례가 없다는 본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행장보다 막강한 본사'도 조직의 결속력을 해쳤다는 지적이다. 한 은행측 관계자는 "소매금융, 기업금융 등 각 라인별로 행장의 지휘가 아니라 국내현실을 전혀 모르는 영국 본사나 아시아본부의 지휘를 받는다"며 "메리디스 행장이 본사쪽에 불만을 토로한 적까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외인부대'의 과도한 점령도 노조의 반발을 샀다. 무려 20명에 달하는 부행장 중 옛 제일은행 출신은 고작 4명 뿐. 노조 관계자는 "1년 미만의 단기 프로젝트를 가지고 들어와 그것만 해결하면 훌쩍 떠나버리니 장기적인 플랜이 있을 리 없다"고 말했다.
물론 SCB측이 한국 시장을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 한누리증권 인수전에 뛰어드는가 하면, 금융당국을 통해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적극적으로 타진 중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방식을 고집하면 위기를 타개하기가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단기차익만 생각한 사모펀드와 물정 모르는 외국은행으로 주인이 연거푸 바뀌면서 환란 전까지 명실상부한 국내 '리딩 뱅크'였던 제일은행은 10년 만에 군소은행으로 전락한 셈"이라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