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경제의 특이현상 가운데 한가지. 환율이 떨어지는데도 수출을 호조라는 사실이다. 이제 환율하락에도 끄떡하지 않을 만큼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튼튼해진 것일까?
"천만에요. 그냥 거래선 놓치지 않으려고 파는 겁니다. 하지만 수출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늘어 정말로 죽을 지경입니다."
중소수출업체들이 밀집한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은 지금 '한겨울'이다. 모두들 생존의 위기를 절감하는 듯 했다. 통계상으론 수출이 두자릿수 높은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량 효과'일 뿐이다.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고 도금하는 반월공단내 C기업. 생산량의 50% 정도를 미국과 일본에 수출한다. 반월공단에만 3개 생산공장에 직원도 200여명에 이르는 알토란 같은 이 회사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달전.
환란이후 최저수준으로 떨어진 환율 때문이었다. 수출대금을 달러로 받는 C기업으로선, 환율이 내려가는 만큼 고스란히 손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3년 전 이 회사는 달러당 1,150원대의 당시 환율로 미국 자동차 회사인 GM과 납품계약을 체결했다. 910원대까지 추락한 현재 환율로 계산해 보면 이 회사는 지금 달러 당 약 240원의 손해를 보고 있다.
매출이 늘어날수록 손실도 불어나는 적자수출의 늪에 빠진 것이다. 이 회사 L이사는 "환율이 1,000원만 해도 어떻게 해보겠다. 900원 밑으로까지 내려가면 사업을 접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반월공단에서 문구용 잉크를 생산하는 유앤아이도 사정은 마찬가지. 제품의 70% 정도를 중국과 홍콩, 인도 등에 수출하고 있는 이 업체는 이번 달러약세로 총이익의 75% 정도가 증발해버렸다.
이 회사 강태경 이사는 "제조분야에서 마진이 20% 정도 난다고 하면 5% 정도는 연구개발에 투자하는데 이번 달러 약세 사태로 나머지 이익 15%가 모두 날아갔다"며 "환율약세로 인해 한 달에 8,000만원 정도 손해를 보고 있다"고 털어놨다.
유앤아이는 제품군의 다양화와 신제품 개발 등 나름대로의 환율 자구책을 마련중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책으로 환율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강 이사는 "환율이 최소한 950원은 되어야 사업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컴퓨터 반도체나 하드웨어용 진공 포장 기계를 유럽과 싱가포르등에 수출하는 인트라이즈는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 결제통화가 달러가 아닌 덕이다. 전세용(40) 이사는 "결제를 하는 유로화 가치가 요즘 올라서 환율변동으로 인한 어려움이 적다"며 다소 여유로운 표정을 내비쳤다.
사실 중소기업이 달러이외의 통화로 대금결제를 한다는 것은 것은 이례적인 동시에 '위험'스러운 일이지만, 지금 같은 달러약세 국면에선 이런 모험이 오히려 효자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량만 많으면 수출통계는 일단 화려하게 잡힌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몇몇 대기업들 뺀 상당수 중견ㆍ중소기업들은 채산성 악화, 심지어 출혈수출까지 감내하고 있다.
여기에 거래 대기업들의 '납품가 후려치기'마저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 통계에는 보이지 않는 환율하락의 그림자는 꽤나 짙고 깊은 상황이다.
● 최홍건 中企연구원장 인터뷰/ "원화강세 필연적 상황 中企, 환리스크 관리해야"
최홍건 중소기업연구원장은 9일 본지 인터뷰에서 "미국경제가 1990년 이후 점차 성장이 둔화되고 있고 국내경제는 증시가 사상최고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등 원화강세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환율이 조만간 800원대로 진입할 상황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환율하락에도 불구, 올해 중소기업 수출액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최 원장은 "달러표시 수출가격이 상승해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사실 '밑지고 파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미국을 제외한 중국 중동 지역 등의 경기가 호조를 보여 환율하락에도 불구하고 국내 중소업체의 수출량이 줄지 않았지만, 실상은 많이 파는 만큼 손해를 보는 소위 '적자수출' 형국"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중소 수출업체들이 대부분 국내외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것. 최 원장은 "수출대기업에 납품을 병행하는 수출업체들은, 환율이 내려감에 따라 대기업으로부터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압력까지 받는다"며 "중소기업들은 수출과 내수 양면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중소기업이 환율하락에 유독 약한 이유는 뭘까?
최 원장은 '환리스크 관리에 대한 중소기업의 인식 부재'를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지난 7월 신용보증기금에서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환위험 관리를 전혀 하지 않는 중소기업 비중이 82.3%에 달했다.
최 원장은 "전문인력 부재도 문제지만 수출시장과 결제통화를 다변화하거나 환변동보험에 가입하는 등의 기초적인 노력?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위험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두 번째 이유로 '낮은 기술경쟁력과 미흡한 제품차별화'를 들었다. 그는 "중소업체들은 대부분 저렴한 가격경쟁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리미엄 제품개발 등 가격 외 경쟁력을 강화해야 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최 원장은 "과거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지날 때 일본 중소업체들은 품질향상에 힘써 결국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었다"며 "국내 경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결국 중소기업 자신의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출실적 200만 달러 이하의 영세 수출기업이라면 지난 9월부터 본격 가동된 수출도우미(e-에스넷)도 활용해볼 만 하다"고 조언했다. 중앙수출지원센터 문의는 (02)761-4720.
문준모기자 moonjm@hk.co.kr안산= 심혜이 인턴기자(중앙대 정치외교학과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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