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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실험 1년/ "北, 작년 쏘아올린 核은 대반전의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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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실험 1년/ "北, 작년 쏘아올린 核은 대반전의 신호탄"

입력
2007.10.0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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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실험은 외교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한미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지난해 10월 9일 북한 핵실험 이후 1년은 그가 언급한 대로 각국의 외교력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기간이었다.

■ 핵실험은 반전드라마의 시작

2002년 10월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의혹으로 시작된 2차 북핵 위기는 3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2005년 9ㆍ19공동성명이라는 옥동자를 낳았지만 곧 이어 단행된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자금 동결 조치 때문에 북한의 북핵 협상 보이코트로 이어졌다.

북한은 BDA 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직접대화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법 집행의 문제로 협상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교착이 계속됐다.

북한은 미 독립기념일에 맞춰 지난해 7월 5일 대포동2호 등 7발의 미사일 발사실험으로 ‘대북적대시정책’에 대한 응전의사를 확실히 했고 미국은 유엔제재결의와 주요 동맹국의 대북제재 강화로 맞서 갈등이 고조됐다. 3개월 뒤 북한은 풍계리에서 핵실험을 단행, 북핵 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한반도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도 빛은 열리고 있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핵실험 직후 방한한 탕자쉬엔 중국 국무위원에게 협상의사를 전달했고 이는 지난해 10월 31일 북ㆍ미ㆍ중 3자 베이징 회동으로 이어져 12월 6자회담 재개합의 등 외교적 해결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핵실험은 핵 신고 및 불능화를 골자로 한 2ㆍ13합의와 10ㆍ3합의로 이어지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다시 빛을 발한 셈이지만 한편으론 운도 좋았다. 무엇보다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전력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라크 정정불안과 이에 따른 중간선거 패배는 대북강경파의 퇴진과 협상파의 득세를 불렀기 때문이다.

■ 북한은 기회를 잡을 것인가

북한은 여러 차례 북미관계 개선기회를 잡았지만 무엇 이유에선지 결정적 순간에 발을 뺐다. 가장 최근으로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 등 북미화해 무드가 완연했던 2000년 빌 클린턴 정권 말기다.

당시 북미수교로 이어질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협의가 오갔지만 북한은 ‘미사일 포기’에 대한 확답을 미루다 방북이 무산됐고 부시행정부의 역풍을 맞았다.

북한이 3단계 핵 폐기 협상에서 핵 포기로 북미관계 개선카드를 확실히 잡을 지, 인도ㆍ파키스탄 사례를 염두에 두고 핵 카드를 계속 가지면서 핵 보유국 지위를 얻으려 할 지 여부에 한반도 진로가 결정될 전망이다.

■ 핵실험은 성공했나

태평양을 향해 쏜 미사일이 엉뚱하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다 40여초만에 추락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실험에 이어 야심찬 핵실험도 초라한 실패로 끝났다는 게 한미 정부의 판단이다.

북측은 플루토늄 4kt을 장전하고 핵폭발을 일으켰지만 폭발력은 4분의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을 움직이기 위해 실시한 미사일발사와 핵실험이 역으로 북한의 미사일ㆍ핵 능력의 현주소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정진황 기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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