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역설과 냉소다. 한 줄의 카피(copy)부터 그렇다. 하나는 사랑을 ‘지랄 같네, 사람 인연’ 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잔인한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때문에 결코 해피 엔딩일 수 없다.
비극적이고 잔인한 사랑은 영화나 소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무수하다. <사랑> (감독 곽경택) 과 <행복> (감독 허진호)은 그런 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지랄’ ‘잔인한’은 우리가, 적어도 사랑에서만은 가지고 싶었던 ‘판타지’를 깨버렸다. 행복> 사랑>
판타지가 깨진 사랑은 불행하다. 세상의 온갖 덫을 피해갈 초능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운명에 걸리고, 처지에 울고, 욕망에 넘어지고, 마음에 속는다. 영화는 그 불행이 사랑 자체가 변했기 때문에 오고, 변하지 않았기에 오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 의 인호(주진모)는 끝내 변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미주(박시연)가 어느날 자신이 모시는 어른의 애첩이 돼 나타나도. “여자는 순간”이라는 어른(주현)에게 단호하게 “저는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반면 <행복> 의 영수(황정민)는 변한다. 죽음의 병(간경화증)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여자 은희(임수정)에게 “밥 천천히 먹는 것 지겹지 않아. 난 지겨운데”라고 말하고는 도망친다. 행복> 사랑>
그렇다고 인호의 사랑은 아름답게 살아나고, 영수의 사랑은 비참하게 죽어버린 것도 아니다. 사랑도 약속이라면 “내가 지켜주기로” 맹세했기에 끝까지 버리지 않은 인호나, “지금 좋다고 나중에 좋으란 법 있어”라며 미련 없이 여자를 버린 영수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사람은 지랄 같은 운명을 저주하며 그런(사랑이 없는) 인생은 필요 없을 것 같다”며 죽음을 선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잔인하게 변심해 놓고는 뒤늦게 그것도 다분히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달라질게 무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수보다는 인호를, 그의 마음을, 사랑을 더 아름답게 보고 싶어한다. 똑 같은 죽음으로 끝이 나도 은희보다는 미주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참 통속적 감정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이란 어차피 통속이고, 통속이기 때문에 보고 또 보고, 하고 또 하고,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은 것일 터. 통속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보다 완벽한 사랑을 꿈꾼다.
비록 현실에서는 그 판타지가 매번 배신 당할 망정 영화에서만은 그렇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허진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봄날은 간다> 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절규하는 상우(유지태)가 안쓰러웠고, 배신한 영수의 추락을 인과응보라고 여기며, 사랑에 목숨 건 인호의 마지막 모습이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는지 모른다. 봄날은>
누구는 ‘사랑, 그 자체가 달콤한 당의정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 달콤한 환상을 영화마저 외면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현실(리얼리즘)’이라 해도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 어차피 영화 차제가 환상인데.
문화대 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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