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스트 텔칙 지음ㆍ윤여덕 옮김 / 한독산학협동단지 발행ㆍ453쪽ㆍ1만5,000원콜 총리 참모가 기록한 ‘통독담판 329일’ 고르비·미테랑과의 막후협상 등 생생한 묘사
1990년 7월 15일 모스크바의 소련 외무부 영빈관.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마주 앉았다.
현안은 통일된 독일이 나토의 회원국이 될 수 있는가 여부. 냉전시대 체결된 바르샤바조약의 핵심국가인 동독 지역에 대해 통일 후에도 소련이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고집한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한 국면이었다. 콜 수상은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로 “역사의 외투자락을 붙잡아야 한다”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인용하며 소련 최고지도자의 결단을 촉구했다.
회담 직전 열린 전당대회에서 독일 통일을 반대하는 공산당 과격세력의 압력에 시달렸던 고르바초프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만물은 흐르고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로 응답하며 통일독일의 나토 회원국 잔류 요구를 받아들인다.
현대사 최초로 고통이나 충돌 없이 이루어진 독일 통일의 분수령이 된 순간. 그 곳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있었지만 이를 지켜본 또 한 명의 위대한 기록자도 자리하고 있었다. 1972년부터 콜의 참모로 일했던 호르스트 텔칙이 그 사람이다.
텔칙은 독일의 통일과정을 기록한 비망록 <329일>을 통해 ‘벼락같이 찾아온’ 통일의 과정을 생생하게 조명한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하루 2,000명에 달하는 동독 주민의 서독 이주, 동독체제를 유지해온 비밀경찰 슈타지 본부의 습격 등, 당시 통일독일로 향하는 역사의 흐름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셌다.
하지만 주변국가들은 독일 통일에 비협조적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미국, 소련 모두 나토와 바르샤바체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며 노골적으로 통일독일의 출현을 반대했다.
콜을 보좌해 통일프로세스를 기획했던 저자는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1989년 11월9일부터 통일독일이 출현하는 이듬해 10월 2일까지 329일간 이 사태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며 ‘이 같은 어려움들을 뚫고 어떻게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를 기록했다.
결단력있게 통일 프로세스를 추진하지만 한편으로 테러 위협에 시달렸던 콜의 인간적 고뇌, 통독 허용을 빌미로 더 많은 경제적 반대급부를 얻어내려는 노회한 소련 외교관들과의 신경전, 무기력하고 믿을 수 없는 동독 지도자들, 독일인들의 민족적 독주에 대한 두려움과 통일과정에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상반된 마음으로 갈등하던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등 독일 통일의 막후(幕後) 풍경들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독일 통일은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의 실권 유지, 통독에 대한 강대국간 합의가 마무리된 뒤 발생한 1차 걸프전 등 행운도 작용했지만,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역사의 변곡점에서도 냉철한 판단을 내린 지도자들과 그들의 타협을 향한 용기가 큰 몫을 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민중적 동력이 통일의 가장 큰 힘이 되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도 주변국가를 설득하고 인내하고 타협할 수 있는 준비된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우리가 참고해야 할 책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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