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blockbuster)는 원래 도시의 한 블록을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폭탄을 일컫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보유했던 5톤 무게 폭탄의 실제 이름이기도 한 이 말은, 현대에 들어서는 마치 거대한 폭탄이 도시를 휩쓸어버리듯 박스오피스를 점령하는 ‘대작 영화’를 지칭한다. 최근 미국에서 개봉해 1,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낸 <디워> 가 300억원을 투자해 만든 대표적인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에 해당한다. 디워>
이제 블록버스터는 스크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편당 제작비로 수억원 이상이 투입되는 블록버스터가 드라마 시장에서도 그 위력을 떨치고 있다. 외국 자본에 비해 부족한 제작비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볼거리보다는 스토리와 잔잔한 멜로 라인으로 승부해온 국내 드라마들도 점차 블록버스터라는 대세에 올라타고 있다.
어째서 우리의 드라마들도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는 블록버스터의 형태로 생산되어야 할까. 무엇이 430억원짜리 <태왕사신기> 와 120억원짜리 <로비스트> 를 탄생시켰을까. 한국형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법칙을 알아보자. 로비스트> 태왕사신기>
■ 왜 블록버스터를 원하는가
드라마 마니아들은 올 가을 수, 목요일 밤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드라마 역사상 초유의 대작들인 MBC <태왕사신기> 와 SBS <로비스트> 가 유감스럽게도(?)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기 때문이다. 로비스트> 태왕사신기>
둘 다 24부작으로 <태왕사신기> 는 편당 18억원, <로비스트> 는 5억원이 투입된 명실상부한 블록버스터 드라마다. 각각 전체 분량의 90%, 40%를 사전 제작했으며 뉴욕 워싱턴 키르키스스탄 등에서 해외 로케가 이뤄지는 등 블록버스터의 요건을 빠짐없이 갖췄다. 로비스트> 태왕사신기>
<태왕사신기> 의 제작비가 <로비스트> 의 3배를 넘지만 사극의 특성상 세트장( <태왕사신기> 의 오픈세트 비용은 약 130억원. 반면 <로비스트> 등 현대물은 세트장이 따로 필요없음) 및 소품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터라 두 작품의 투입자본 규모는 비슷하다고 보는 게 맞다. 로비스트> 태왕사신기> 로비스트> 태왕사신기>
두 드라마의 흥행성적은 말 그대로 ‘돈값’을 한다는 평이다. <태왕사신기> 가 아직 3분의 1 정도만 방송됐지만 이미 흥행드라마를 가르는 경계인 시청률 30%의 벽을 넘었고 10일 첫 방송될 <로비스트> 도 “ <태왕사신기> 를 보지 않는 나머지 70% 중 30%의 시청자가 <로비스트> 의 마니아가 될 것”이라는 제작진의 장담처럼 전망이 어둡지 않다. 로비스트> 태왕사신기> 로비스트> 태왕사신기>
이렇듯 특별한 마니아가 아니면 빼먹지 않고 보기 힘든 시간대인 주중 심야 드라마들이 속속 블록버스터로 탄생하는 흐름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첫째, 대중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대중은 이미 블록버스터 작품들로 장악된 영화관에서의 경험을 충분히 갖고 있다. <괴물> <트랜스포머> <디워> <화려한 휴가> 등 거액의 제작비를 동원해 볼거리를 무기로 내세운 영화들이 각각 1,000여만 명씩의 관중을 그러모은 덕에 문화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상당히 업그레이드됐다는 의미다. 화려한> 디워> 트랜스포머> 괴물>
수준높은 영상물에 눈이 익은 이들은 더구나 점차 보편화하고 있는 고화질 HD TV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지난해 말 보급률 24%) 그야말로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시원시원한 영상을 요구하는 수요가 급속히 늘고 있는 셈이다.
<태왕사신기> 의 경우 첫 회 방송이 나가자 시청자 게시판에 “스토리가 복잡하다”는 지적이 많았으나 이후 “화면이 정말 좋다. 꼭 영화 같다”거나 “ <태왕사신기> 를 보다가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니 답답해서 보기 힘들었다”는 반응이 점차 늘었다. 태왕사신기> 태왕사신기>
요즘 영화 관객들이 멜로나 코미디 영화는 “드라마 같다”며 돈 내고 보기 아깝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듯이, 마치 영화 스크린을 보는 듯한 고급 TV 장비를 갖춘 이들에게 블록버스터가 아닌 일반 드라마가 매력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니 드라마 제작자들이 돈타령만 하면서 블록버스터 제작을 주저할 수 있으랴.
두번째 이유는 시대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동시에 정치적 격변기를 경험한 소비자들에게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웅’들은 여타 드라마의 ‘소시민’보다 어필하기가 쉬웠다.
중국의 동북공정, 서구의 무역 압박에 맞서 해외로 진출하는 진취적인 캐릭터를 은근히 바라는 시청자의 마음도 <주몽> 과 <연개소문> 에 이은 <태왕사신기> , 그리고 <에어시티> 의 이정재 등의 출연을 부추기는 원인이 됐다. 에어시티> 태왕사신기> 연개소문> 주몽>
한국 드라마의 블록버스터화는 또한 한류 시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 초록뱀미디어 프로듀서 서장원씨는 “블록버스터 드라마에 투입되는 제작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보니 일본, 중국 등 외국시장 진출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 한류 스타를 캐스팅하는데 힘을 쏟는다”고 말했다.
<태왕사신기> 는 ‘욘사마’ 배용준이 없었다면 존재의미 자체가 흐릿해졌을 게 분명하지만, 아무리 배용준이라도 예전의 <겨울연가> 와 같은 멜로드라마로는 더 이상 일본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는 실정이다. ‘블루칩’ 배용준과 430억원짜리 블록버스터가 만나야만 해외시장에서 국산 드라마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겨울연가> 태왕사신기>
프레인의 김정오 팀장은 “덩치가 큰 드라마들은 이미 국내 수익으로 제작비를 충당하려 하지 않는다. 해외 수익의 비중을 갈수록 높게 잡고 있기 때문에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만들 때 외국 소비자들의 취향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밖에 블록버스터는 드라마 제작사가 방송국과 편성 협상을 할 때 일반 드라마의 경우보다 우위에 설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선호한다. 김양 DSP엔터테인먼트 이사는 “드라마 편성에는 방송사가 절대적인 힘을 쥐게 되지만 대작 드라마일수록 홍보 효과가 자체로도 상당해 제작사의 입김이 어느 정도 먹히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 한국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법칙들
한국 블록버스터 드라마는 고유의 특징들이 있다. 미국 등 서구의 드라마 대작이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 묘사에는 아무래도 서툰 반면, 한국 드라마들은 오랫동안 이런 점에 방점을 찍어온 터라 볼륨이 커진 블록버스터라도 아기자기한 스토리를 품고 있다는 점 등이 이에 속한다.
먼저 한국 블록버스터 드라마는 공통적으로 시대적 배경이 사실적이다. 실제 역사보다 판타지에 가까운 스토리가 전개된다고 하는 <태왕사신기> 도 광개토대왕이라는 실존 인물을 다뤘고, 린다 김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로비스트> , 고구려 창건이라는 역사를 품은 <주몽> 등 빠짐없이 사실적 시대 배경을 깔고 있다는 특징을 고수한다. 주몽> 로비스트> 태왕사신기>
정석희 TV칼럼니스트는 “한국에서는 아예 시대성이 제거된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나 <트랜스포머> 같은 SF 장르의 드라마는 시청자의 주류를 차지하는 중장년층의 호응을 받기 힘들기 때문에 만들어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시청자는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드라마에서 받아야 호응한다”고 덧붙였다. 트랜스포머> 반지의>
두번째 특징은 ‘남성 영웅 성장담’이다. <태왕사신기> 를 비롯해 <올인> , <연개소문> 등 대부분의 대작 드라마가 한 영웅의, 그것도 남성의 일대기를 어린 시절부터 샅샅이 다룬다. 연개소문> 올인> 태왕사신기>
이런 시스템은 나름대로 스토리 설명이 친절하기 때문에 시청자를 붙잡아두기가 쉽고 더구나 젊은 시청자들에겐 마치 RPG게임을 즐기는 듯한 느낌도 주는 장점이 있어 많은 드라마 제작사가 이런 장치를 선택한다.
이와 달리 미국의 블록버스터 드라마는 태어나면서부터 영웅의 풍모를 담고 있는 캐릭터보다 소시민에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캐릭터를 더 선호한다. 미드 <로마> , <히어로즈> 를 보면 타고난 영웅성과 관계가 없는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으로 고민하고 오히려 정체성에 대해 괴로워하며 급기야 영웅성을 버리려 하는 모습에 초점이 맞춰지기까지 한다. 히어로즈> 로마>
세번째는 ‘톱스타 캐스팅’을 꼽을 수 있다. <태왕사신기> 가 이지아라는 신인을 여주인공으로 발탁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블록버스터는 이미 시장에서 입증된 스타만을 골라 캐스팅했다. 태왕사신기>
한 시청률 조사기관에 따르면 <태왕사신기> 에 출연한 주연급 연기자 대부분이 30% 이상의 시청률을 달성한 경험을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배용준의 <첫사랑> , 최민수의 <사랑이 뭐길래> 는 50% 이상의 시청률을 보인 드라마들이다. 사랑이> 첫사랑> 태왕사신기>
반면 미국의 대작 드라마 주인공은 그다지 스타급을 기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프리즌 브레이크> 의 ‘석호필’ 웬트워스 밀러를 보더라도 그렇다. 한국 블록버스터 드라마 제작자들은 아무래도 실패할 경우에 대한 두려움이 커 흥행 보증수표인 톱스타들을 선호하는 보수적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프리즌>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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