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KY'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는 뜻인 '구키(空氣) 요메나이(讀めない)'의 머리글자를 영어로 딴 말이다. 이런 조어 습관이 없는 우리가 같은 말을 BPM이라고 해봐야 뜻이 통하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흔한 조어법이다.
'KY 정치인'이라는 말이 나오고, 8월 말의 개각을 두고 일본공산당 이치다 다다요시(市田忠義) 의원이 "KY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새 내각은 긁어 모으고(가키아쓰메), 끌어 모은(요세아쓰메) KY 내각"이라고 밝힌 이래 'KY 내각'이라는 말도 자주 들린다.
■정치지도자에게 'KY'라는 평가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잘 보여 주었다. 7월 말 참의원 선거에서 사상 두 번째 참패를 기록하고도 국민의 '바꿔' 요구를 깨닫지 못하고 'KY 총리'로 머물더니 돌발 사임했다.
참의원 선거를 전후한 일본 언론의 끊임없는 예측과 경고를 생각하면, 그의 'KY 증세'는 말은 들어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글은 보아도 글귀를 새기지 못한 때문이다. 일본 정계만의 증상도 아니다. '이명박_부시 면담' 해프닝도 '적극적 고려'를 승낙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했다.
■개인이든 사회든 먹고 살 만해질수록 말이 부드러워지고, 직설적 어법 대신 에두른 표현을 선호하게 된다. 상대방 면전에서 일도양단하듯 잘라 말할 경우 일어나기 쉬운 현장 특유의 불쾌감 증폭 현상을 피하고 싶어서이다.
구미 선진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이미 '고려'나 '검토'는 그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든, 거절의 완곡한 표현이 된 지 오래다. 협상 과정에서 얼마나 치고 받았든, 나중을 위해서라도 모양새는 갖춰야 하는 외교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흔히 말하는 '외교적 수사'란 인류가 축적해 온 외교적 지혜의 정수이다.
■따라서 협상의 실상에 접근하려면, 외교적 수사를 끊임없이 제거해 나가야 한다. 현실적으로 다른 나라인 남북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준비한 보자기가 작을 정도로 성과가 컸다고 밝힌 '2007 남북정상 선언'도 온갖 수식어와 '노력' 등의 추상적 어휘를 지우고, 글귀를 새겨 읽으면 느낌이 전혀 달라진다.
11월 국방장관 회담 개최, 내년 베이징 올림픽 남북응원단 경의선 열차 이용 등 숫자가 들어간 합의를 빼고, 부담이 따라붙지 않은 이득이라고는 없다. 노 대통령의 말귀 어둡기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국민이 덩달아 말귀가 어두워질 필요는 없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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