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평양 체류 일정을 하루 더 연장해 달라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요청을 노무현 대통령이 거절한 것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예측할 수 없는 스타일의 김 위원장이 또 하나의 '깜짝쇼'로 노 대통령을 놀라게 했다는 것. 특히 일간 워싱턴 포스트와 가디언 등의 인터넷판은 "경호 및 의전 담당과 의논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대답에 김 위원장이 "대통령이 그 결정도 못 하느냐"고 되물은 대화 내용 전문을 전하며 대통령의 '결정 권한'에 대한 양 지도자의 서로 다른 시각이 흥미롭다고 전했다.
● 미국
미국 언론들은 제2차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된 소식을 속보로 전하면서도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을 영접할 때 보인 '무표정'과'냉담함'의 배경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또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들은 북한이 정상회담 일정의 하루 연장을 제안한데 대해"'깜짝쇼'를 즐겨온 김 위원장의 스타일로 볼 때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면서 "북한측 영접 분위기에 대한 남한측의 문제제기를 듣고 김 위원장이 뒤늦게 선심을 쓰려 한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현금이 부족한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으로부터 큰 규모의 '돈 주사'를 맞을 수 있게 됐다"고 회담의 성격을 규정한 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을 영접할 때 활기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신문은 이어 "인민복 차림의 김 위원장은 동원된 평양 군중에게 손을 흔든 뒤 노 대통령과 악수할 때 절제된 미소만을 보였다"면서 "김 위원장은 기분이 언짢은 듯 노 대통령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는 "남북한의 양 지도자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급박한 동기에 의해 정상회담을 갖게 됐다"며 "노 대통령을 처음 영접할 때 냉담한 모습을 보였던 김 위원장이 3일엔 노 대통령에게 '잘 주무셨나'고 말하는 등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바꿨다"며 배경을 궁금해 했다.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는 "노 대통령이 회담에서 어떤 제안을 할 것인지를 사전에 밝히지 않아 한국의 보수세력에게 비판을 받았다"며 "두 지도자 모두 12월 실시될 한국 대선에서 지지율이 크게 앞서 있는 보수 야당이 승리하는 것을 막기를 바라고 있다"고 논평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노 대통령을 맞이하는 김 위원장이 피곤한 듯 웃음기 없는 표정을 지었다고 전했다.
● 중국
중국과 홍콩의 언론들은 이번 정상회담이 7년 전과 미묘하게 다른 점을 부각하면서 대선을 앞둔 한국 국내상황에 주목했다.
홍콩 친중국계 방송인 봉황(鳳凰) TV는 3일 '악수만 나누었을 뿐 포옹은 안 해'라는 기사를 통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포옹을 하고 같은 차로 평양시내를 이동했지만 이번에는 노 대통령과 악수만 나누었다"며 김 위원장의 평정한 분위기를 짚었다.
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허풍쟁이의 블록버스터?, 기대해서는 안 돼'라는 사설에서 지나친 기대를 경계했다. 사설은 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는 과정에서 '할리우드적' 분위기가 가미된 이후 김 위원장의 영접으로 이벤트가 '블록버스터'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이어 "북한의 이런 교묘한 환영법은 실익을 챙기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만큼 더 높은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베이징 조간 신경보(新京報)는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반도 전문가 리둔치우(李敦球) 연구원의 말을 인용, "한국 대선을 앞두고 진행되는 정상회담은 미묘한 파장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전했다. 홍콩 신보(信報)도 북한이 한국의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읽힌다고 분석했다.
중국 언론들은 이번 정상회담의 의제가 평화, 경제협력, 통일 논의 순이라며 3일 진행된 회담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신화통신은 김 위원장이 회담을 하루 더 연장하자고 요청했다는 기사를 긴급 속보로 전했다.
한편 중국 언론들은 이번에 김 위원장의 퍼스트 레이디 등장을 기대했지만 무산됐다는 점을 비중 있게 다뤄, 북측 내부 사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반증했다.
● 일본
일본 정부는 기대반 우려반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봤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는 이날 의회 답변에서 노 대통령이 "납치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다"며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일본 정부와 여당 관계자들도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가 획기적으로 진전될 수 있다"며 회담 결과를 매우 궁금해 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았다. "노 대통령이 일본의 문제를 해결해 줄 리 없다"는 불신감을 바탕으로 남북의 '지나친 접근'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일본 언론들은 다양한 시각으로 정상회담을 분석했다. 교도(共同)통신은 일본 정부가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지원을 표명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지원이 대규모로 이뤄질 경우 유엔 결의에 입각한 대북 경제제재와 일본의 독자적인 제재 효과가 약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요미우리(讀賣) 신문은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한 손으로 악수하고, 무표정했으며, 별도의 자동차로 이동한 점 등을 들며 "여유의 김 위원장이 주도권을 쥐었다"고 평가했다. "노 대통령이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고 보도한 이 신문은 이날 정상회담을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진검승부'라고 표현했다.
일본 주요 신문의 대체적인 논조는 정상회담을 통해 핵 문제의 진전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사히(朝日) 신문은 사설에서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입으로부터 핵포기라는 언질을 받아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니혼게이자이(日經) 신문도 '남북 화해의 연출보다 핵 폐기의 길을 제시하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워싱턴=고태성특파원 tsgo@hk.co.kr베이징=이영섭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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