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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새해 예산 257조원의 운명

입력
2007.10.0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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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정부가 짜는 다음해 예산안 규모는 경험칙 상 급팽창한다. 외환위기에 처했던 1997년을 예외로 치면, 2002년 만든 새해 예산안은 전년보다 9.1% 늘었고, 얼마 전 내놓은 내년 예산의 총지출 역시 7.9% 늘어 257조원에 달한다. 실질 성장률은 물론 경상성장률 전망치마저 뛰어 넘는 규모다.

결코 정권 연장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집권세력의 정치적 계산과, 대선일정에 휩쓸려갈 국회의 허술한 예산 심의에 편승하려는 각 부처의 이해가 맞닿은 결과일 게다.

● 복지ㆍ균형 코드에 '재정규율' 상실

그런데 야당이 50%대의 지지율을 자랑하는 후보로 정권 교체를 확신하는 올해에는 예산 심의가 좀 까탈스러울 것 같다. 참여정부의 동반성장론을 격하게 비판해온 야당이라도 예산규모가 급증한 것은 싫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분배를 통한 성장' 코드가 완결판으로 제시됐다고 평가되고 비판 받는 새해 예산을 어물쩍 넘겨서는 '성장을 통한 분배'를 주장해온 수권세력의 색채는 흐려지기 십상이다. 또 '큰 정부 대 작은 정부' 논란을 푸는 핵심 열쇠도 야당이 예산의 성격을 어떻게 설정하고 내용을 어떻게 칼질하느냐에 달려 있다.

국가재정법 도입과 남북정상회담 일정 등으로 예산편성 기간이 예년의 3분의 2로 줄어든 바람에 곤욕을 치른 기획예산처는 벌써부터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물러가는 정부가 새 정부에게 분배와 복지의 가이드라인을 던지고 과제까지 대못질하는 거냐"는 지적이 터져나와서다.

더구나 예산 실무자들이 믿고 따랐던 변양균 전 장관이 신정아씨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위해 국가예산을 유용했다는 혐의마저 받고 있으니, 그와 관련된 항목을 포함한 예산 전반의 적정성 문제가 국회에서 거센 추궁을 받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사정을 의식한 듯, 장병완 예산처 장관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성장을 뒷받침하고 안보를 튼튼히 하며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재정 본연의 역할은 불변"이라며 "다만 속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차기정부에서 자신은 '확실하게 없을 사람'이기에 이런 말을 부끄럼없이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저출산ㆍ고령화와 양극화가 가속화하는 현실적 조건 아래서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고차방정식이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는 얘기다.

그는 또 지출예산 증가율(7.9%)의 절반을 넘는 4.3%포인트, 즉 10조원대의 돈이 정치권의 결정에 따라 내년부터 도입되는 기초노령연금과 지자체 교부율 상향조정분 등에 쓰여 실제론 별로 늘어난 것도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부터 미덥지 않다. 예산의 규모와 배분의 적합성을 따지기에 앞서, 예산부처가 지켜야 할 기본자세를 잃은 듯 해서다. 정부살림의 순서는 가계와 좀 다르지만, '예산 제약(budget restraint)'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선 같다.

수입을 감안해 지출계획을 짜야 한다는 뜻이다. 집행부처는 어떻게든 예산을 많이 받아내 사람과 조직을 늘리고 사업을 벌리려고 악쓰기 마련이다. 이를 견제하는 것이 예산당국의 책무다.

그런데도 예산처가 먼저 복지 증대의 불가피성과 균형발전의 시대정신을 언급하는 것은 스스로 '재정 규율'을 훼손하는 것이다. 참여정부 4년간 국가채무가 이전 50년 동안 쌓인 것보다 더 많이 늘어 300조원을 훌쩍 넘고, 적자국채 발행액만 30조원을 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예산제약 않는 살림은 파탄 불러

실제로 예산처는 "당해 연도 재정의 건전성에 신경 쓰기보다 부처이름 앞에 붙은 '기획', 그것도 '비전 2030' 등의 중ㆍ장기 계획을 만드는 데 앞장서왔다"는 비아냥을 받는다.

성과관리 디지털회계 세출 구조조정 등 나름대로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지만, 나라의 곳간이 비면 이런 것은 다 무용지물이다. 분배-복지-균형 등의 방향이 옳다고 마구 과속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도, 목적을 이룰 수도 없다.

집권을 눈 앞에 뒀다고 여기는 야당이 요즘 한술 더 떠 복지공약을 늘어놓고 있으니 예산처로선 한숨 돌릴지 모른다. 그러나 수입은 어음으로 받고 지출은 현금으로 하는 나라가 선진국이 됐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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