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는 영웅을 낳는 법. 세계금융시장을 공황 상태로까지 몰고 갔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역시 스타를 배출했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FRB도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주택가격상승→방만한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화로 이어지는 이번 위기의 인과관계에서, 애초 발원지는 FRB가 구축해놓은 저금리체제(과잉유동성)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냉키 의장은 강력한 한방(0.5%포인트 금리인하)으로 시장불안을 잠재운 영웅이 됐다. 더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금리인하의 부작용인 도덕적 해이를 고심하는 '원칙론자'의 자세와 ▦그러면서도 최종 순간엔 시장에 기대(0.25%포인트 인하)이상의 후한 선물을 안겨주는 '현실론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전임 그린스펀과 대비됐던 '아마추어 FRB의장'의 딱지를 떼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린스펀이 말하면 시장은 듣는다(When Alan Greenspan talks, the markets listen)'는 월스트리트의 경의 넘치는 표현처럼, 이젠 버냉키가 말해도 시장은 들을 수 밖에 없게 됐다.
만약 인하폭이 0.25%포인트였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시장은 실망한 채 계속 떼(추가금리인하)만 썼을 것이다. 0.25%포인트 아닌 0.5%포인트를 내림으로써, FRB는 시장에 그만큼의 추가유동성 뿐 아니라 위기진화 의지까지 전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FRB의 리더십은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데서 나온다. 쥘 때는 확실하게 쥐고, 펼 때는 확실하게 펴는 식이다. 0.5%포인트 금리인하결정에 대해 '버냉키의 굴욕'이란 비아냥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확실히 풀어줄 타이밍으로 해석한 듯 하다.
우리였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두 달에 걸쳐 0.25%포인트씩 낮출지언정 단 번에 0.5%포인트 인하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시장도 시큰둥했을 테고.
사실 이번 금리인하결정을 두고 '파격'이란 평가가 나왔지만, FRB에게 0.5%포인트 인하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2001년엔 0.5%포인트의 금리인하를 무려 8번이나 단행한 적도 있고, 1994년에는 단 번에 0.75%포인트를 끌어올린 예도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콜금리 목표제가 도입된 1999년이후 한국은행(BOK)이 0.5%포인트 금리를 내린 것은 2001년 9ㆍ11테러 직후, 딱 한번이었다. 나머지는 올라갈 때든 내려갈 때든 '아장아장' 0.25%포인트 보폭을 벗어난 적이 없다.
FRB는 2004년6월~2006년6월 무려 17회 연속 금리인상 퍼레이드를 펼친 적도 있지만, BOK는 두 번 연이어 올린 것도 지난 7~8월이 처음이었다. 1999년 이후 미국의 기준금리는 최고 연 6%까지 올라갔다가 최저 1%까지 떨어졌지만 우리나라 콜금리는 아무리 올려도 5.25%, 내려도 3.25%였다.
금리 올릴 때 확실히 못 올리면 내릴 때도 확실히 못 내린다. 시장을 쥘 때 제대로 못 쥐면 펼 때도 제대로 펼 수 없다. 엉거주춤한 중앙은행을 시장이 경청할 리 없다. 무책임한 시장에는 혼도 좀 내주고, 힘겨워 하는 시장은 달래도 줘보자. 그렇게만 하면 'BOK가 말할 때 시장은 듣는다!'
경제산업부 이성철차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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