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향해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산’을 외치고 있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주민들에게는 연방 상ㆍ하 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이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원의 경우, 워싱턴 주민들은 소속 상임위에서만 투표할 수 있을 뿐 하원 전체회의에서는 투표권이 봉쇄된 ‘대표(Delegate)’를 뽑을 수 있을 뿐이다. 이 대표는 주요 법안 등과 관련된 결정적인 투표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식 ‘하원의원(Representative)’과는 명확히 구별된다.
뿐만 아니라 워싱턴 주민들은 상원의원의 선출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워싱턴 주민들로부터 뿐 아니라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도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이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하원에서 완전한 투표권을 갖는 하원의원(Representative)을 자기 손으로 뽑는 것은 200여년에 걸친 워싱턴 주민들의 숙원이다. 미국의 수도가 뉴욕, 필라델피아를 거쳐 1800년에 워싱턴으로 옮겨온 이후 워싱턴은 ‘주(State)’가 아닌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의 지위를 갖게 됐고 그때부터 워싱턴 주민들은 의원 선출권을 빼앗기게 됐다.
미국의 헌법이 의원 선출권은 주에 속한 주민들에게만 부여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권을 갖기는커녕 민주주의 기본권이 봉쇄된 워싱턴 주민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그들의 자동차에 ‘의원선출권 없는 과세’를 당하고 있는 취지의 문구가 포함된 번호판을 달고 다니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기본권을 되찾으려는 워싱턴 주민들의 오랜 노력은 최근에 또 좌절됐다. 미 상원은 18일 워싱턴 주민들에게 완전한 하원의원 선출권을 부여하는 법안의 처리 여부를 묻는 투표를 실시, 57대 42로 부결시켰다. 미 상원에서 법안 처리에 착수하려면 60표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 법안은 4월 하원에서 찬성 241표, 반대 177표로 통과돼 워싱턴 주민들에게 ‘반짝 희망’을 주기도 했으나 결국 상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주도한 이 법안에 주로 공화당 의원들이 반대한 표면적 이유는 ‘헌법 위반’이라는 것이었으나 실은 워싱턴 주민들이 대부분 민주당 지지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 걸림돌이었다. 현재 60여만명인 워싱턴 인구 가운데 70% 이상이 흑인이고 이들은 대체로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
공화당 의원들은 이 법안이 현실화하면 민주당에 하원의원 1석을 보태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워싱턴 주민들이 다른 주들처럼 상원의원 2석을 배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데 물꼬를 터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공화당 텃밭인 유타 주에도 하원의원 1석을 추가하는 방법으로 균형을 맞췄으나 공화당은 끝내 당리 당략적 사고의 틀을 뛰어넘지 못했다. 이런 공화당의 태도 때문에 워싱턴 주민들의 대통령 선거 투표권 행사도 1961년 이후에야 가능해 질 수 있었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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