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스기 야스시 등 엮음ㆍ황영식 옮김 / 한울 발행ㆍ397쪽ㆍ2만7,000원
자본주의 체제로의 진입과 함께 일찍이 민족을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를 수립한 유럽. 2차례의 전쟁을 맛본 이들이 국민국가 모델을 폐기하고 유럽연합(EU)이라는 형태로 경계 허물기에 나서고 있다. 아시아의 경우는 어떨까?
한ㆍ중ㆍ일 동아시아 3국을 볼 때, 한반도는 여전히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이 지상과제이고, 50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소수민족의 분리 움직임을 차단하면서 국민국가보다는‘중화(中華)’로 상징되는 문화통합적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일찍이 국민국가를 형성했지만 노동력 부족으로 개방적 이민정책을 펼쳐야 하는 일본은 다민족ㆍ다문화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아시아에 대한 적극적 재인식’을 목표로 일본 이와나미(岩波) 서점이 기획한 ‘아시아 신세기 시리즈’(전8권)중 한 권인 <정체성> 은 14편의 논문과 좌담을 통해 아시아인들의 고민거리를 정체성이라는 창으로 들여다본다. 정체성>
그 고민거리란 세계화의 영향으로 국민국가의 틀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완고하게 살아남은 국가가 개인들을 속박하는 모순적 현실이다. 이 책은 한가지 뚜렷한 결론으로 논의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소재를 다양한 형식으로 다룸으로써 이같은 고민에 동참해보려 한다.
책은 다민족ㆍ복합민족국가인 중국과 인도네시아가 어떤 방식으로 국민국가로의 정체성 확립에 힘을 기울였는지, 19세기말부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형성된 한민족 네트워크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지, 호주의 주류를 이뤘던 보수적 백인들이 이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문화ㆍ인종적으로 아시아화가 진행되자 느끼는 딜레마 등을 다루고 있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여러 민족, 여러 문화의 섞여 살기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주목해볼 만한 대목은 일본과 재일 한국인 지식인들이 펼치는 종합토론 부분이다.
결론 격인데 “너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는 물음을 받으면 자신있게 일본인이라고도, 공개적으로 한국인이라고도 대답하지 못한다는 재일동포 2세 작가 양석일씨는 “앞으로 아이덴티티의 개념은 다중화(多重化)하는 동시에 희박해져갈 것”이라고 내다본다.
고스기 야스시(小杉泰) 교토대 교수도 “결국 21세기는‘아시아인’이라는 아이덴티티의 시대가 될 것”이라며 “인종이나 민족 문제와 상관없이 언어를 매개로 공통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있는 아랍세계 같은 모델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에 따라 형성된 문화적 공동체가 붕괴된 후 지난 100년간 이 지역에서 아시아라는 광역 개념의 프로젝트라면 기껏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부정적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은 맥락을 감안하면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역적 신뢰 구축 없이 ‘아시아인’이라는 아이덴티티의 형성은 요원하다는 것, 그리고 지역적 신뢰 구축은 한반도의 분단 극복이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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