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반정부 시위가 군사정부의 무력 진압에도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진압 군인들과 시위대 간 최악의 유혈사태가 우려되고 있고, 국제사회에서는 유엔을 중심으로 미얀마를 압박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사면초가에 놓인 미얀마 군사정부가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미얀마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현재로서는 종잡기 어렵다. ▦군부와 정부가 시민, 승려들의 요구사항인 정치범 석방과 군과 정치인들의 대화를 수용하는 방안 ▦민중 봉기 혹은 군부 분열로 인한 정권의 붕괴 ▦1988년 시위 때와 같은 대규모 유혈 진압 등이 가능한 시나리오로 떠오르고 있다.
BBC 방송은 27일 이번 사태를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과 비교하면서 40여년간 계속된 경제 실정과 폭정으로 정권이 붕괴될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동남아시아 승복의 색상을 뜻하는 사프란(선황색)에서 착안, 미얀마 반정부 시위가 성공할 경우 ‘사프란 혁명(saffron revolution)’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인도네시아가 미얀마의 비교대상이 된 것은 양국의 유사한 정치역정 때문이다. 2차 대전 직후 독립한 양국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돼 국가 건설과정에서 분리주의자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다.
1960년대 들어 군부가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면서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 출신인 수하르토와 네 윈이 각각 집권했다.
그러나 수하르토의 인도네시아가 ‘개방’을 택한 반면 네 윈의 미얀마는 ‘고립’을 택하면서 양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수하르토는 60년대 냉전체제 당시 비동맹주의를 주도한 국제무대의 지도자적 위치를 이용, 열악한 국내 인권상황에도 불구하고 동맹국의 원조와 투자를 얻어냈다. 이를 통한 경제발전은 미약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는 80년대 경제성장을 구가한 반면, 고립을 택한 미얀마는 국내경제의 붕괴로 인해 88년 대규모 반(反) 정부 시위를 초래했다.
국제사회가 더 이상 제3국의 인권유린을 용인하지 않는 90년대 탈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미얀마의 고립정책은 한계에 봉착했다. 게다가 군정이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를 가택연금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국제사회의 정치ㆍ경제적 지원은커녕 더욱 가혹한 경제제재를 부른 셈이다.
양국의 차이는 군부의 시각에서도 드러난다.
수하르토는 군부 인사에게 경제성장의 대가를 제공하며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함께 등장한 중산층과 일부 군부 세력은 정권의 부패 및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수하르토의 퇴진이란 결단을 내렸다.
이에 비해 미얀마는 현재 중산층조차 형성돼 있지 않은 관계로 인도네시아에 비해 군부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다.
국가를 이끄는 엘리트 집단인 군부세력은 국제적 고립으로 잃을 것이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해 민생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얀마 군부의 잘못된 선택과 국내외 정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사태를 더욱 꼬이게 한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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