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경기 성남시에 사는 김주연(6ㆍ가명)양의 부모는 1년 전 조기 영어 교육을 위해 김양을 원어민이 강의하는 영어 학원에 등록시켰다. 하루 4시간 동안 놀이와 학습을 100% 영어로 진행하는 커리큘럼이 재미있었는지 처음 김양은 수업에 잘 적응하는 듯 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자 김양은 “학원 가기가 싫다”며 자주 울기 시작했다.
의사 소통이 자유롭지 못한데다 매일 강의 내용을 복습 시키는 엄마의 성화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김양이 TV 어린이채널의 영어 방송만 봐도 소리를 지르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이자 겁이 난 김양의 어머니는 학원을 그만두게 했고, 김양은 그로부터 한달쯤 지나서야 평소 모습을 되찾았다.
#2.인천 계산동에 사는 주부 김미현(38ㆍ가명)씨는 아들 이종웅(8ㆍ가명)군이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영어 실력이 처지자 고민 끝에 비싼 수강료를 무릅쓰고 이군을 원어민이 수업을 진행하는 영어학원에 넣었다. 단기간에 아들의 영어 실력을 끌어올리려는 욕심에서였다. 그러나 이군에게 영어 수업은 버겁기만 했다.
이군은 학원 같은 반 아이들보다 영어를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진 나머지 내성적으로 변해갔고, 영어는 아예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이군을 영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냈지만 이군은 여전히 영어 공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기 영어교육 열풍이 뜨거워 지는 만큼이나 부작용도 커지고 있다. 부모의 채근에 못이겨 원어민 강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영어 학원 문을 두드리는 유아ㆍ어린이들이 늘고 있지만 영어 실력 향상은커녕 ‘영어 거부증’이라는 상처만 안고 돌아서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영어 스트레스에 원형 탈모증까지
지난해 유아 영어교육 정보 사이트 ‘쑥쑥닷컴’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자녀를 영어 학원에 다니게 하는 학부모 가운데 48.7%가 “아이들이 ‘영어 거부증’현상을 보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아이들은 ▦학원 갈 시간에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거나 ▦‘선생님이 때렸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으며, ▦집안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발을 구르고 ▦영어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등의 거부증상을 나타냈다. 홍성도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는 “아이들이 영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커질수록 정서가 불안해져 이상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도한 영어 교육 스트레스는 신체 건강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임미리 YBM/ECC 수석연구원은 “스파르타식 영어 교육에 시달린 나머지 원형 탈모증에 걸리거나 아토피 증세가 심해지는 아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부모가 기대수준 낮춰야
자녀들의 영어 거부증은 부모의 ‘영어 강박증’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자녀의 눈높이를 고려치 않은 억압식 학습이 아이에게 심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 유명 유아 영어학원 관계자는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의 실력이 떨어져도 항상 자기 자식이 잘 하는 아이들과 함께 영어 수업을 받기를 원하는 등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자식에 대한 과도한 기대 수준을 낮추고, 영어 교육 수준도 아이에 맞게 조정하라고 조언한다. 또 영어를 공부가 아닌 생활과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라고 충고한다.
서울 청담동에 사는 주부 김영희(42ㆍ가명)씨는 첫째 딸 조민진(13ㆍ가명)양이 5세 때 조양을 영어 학원에 다니게 했다. 그러나 1년간 학원 3곳을 전전했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토론식 교육에 아이는 오히려 말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학원을 다시 찾은 조양은 그림, 연극 등과 연계한 놀이식 교육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외국어고 진학을 목표로 할 만큼 영어를 즐기고 있다. 김씨는 “과거엔 무조건 공부 많이 시키는 학원이 제일인줄 알았다”며 “우리 말 배우듯 자연스런 환경을 조성해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성경준 한국외국어대 영어학부 교수는 학부모들에게 “너무 어릴 때 영어를 가르치면 우리 말조차 못하게 된다”며 “초등학교 때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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