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과 분단 비극의 민족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을 보낸 한 지식인이 있다.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흘러간 유랑민의 자손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25년, 북한에서 15년, 해외에서 10년, 남한에서 12년, 그리고 4년간의 감옥생활을 거쳐 출옥이후 문명연구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수일(73)씨다.
11년 전 그가 무하마드 깐수란 아랍계 외국인이 아니라 정수일이란 이름의 북한 공작원임이 밝혀져 투옥된 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같이 살아왔던 아내에게 보낸 옥중편지를 모아 출옥 후 엮어낸 것이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2004년 창비 발행)이다. ‘나를 잊어주오’라는 절규에 ‘기다림’이란 큰 사랑으로 화답한 아내에게 그는 그 동안 자신을 감추느라 못했던 이야기, 미루어오던 이야기, 하고 싶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소걸음으로>
젊은 시절 중국 외교부에서 촉망받던 엘리트였던 그가 수 십년이 흐른 뒤 둘로 갈라진 조국의 한쪽에서 외국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차디찬 감옥 안에 갇혀있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학문 연구로 고통의 세월을 극복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감옥 안에서도 분초를 아껴가며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인 문명교류사 연구에 잠심몰두(潛心沒頭)한 흔적이 옥중편지 곳곳에 남아있다.
1996년 7월 검거돼 그 해 12월 15년형을 선고받은 나흘 뒤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전에 발표했던 논문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고싶다”며 25편의 논문 제목과 발표한 곳, 호수와 형태 등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아내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제 충격과 비탄에서의 허둥거림을 그만두고 황소처럼 묵직하고 침착하게 앞만 내다보면서 걸어나가야 할 것이오. 하나하나를 새로이 출발하고 새로이 쌓아간다는 심정과 자세로 과욕이나 성급함을 버리고 천릿길에 들어선 황소처럼 쉼 없이, 조금도 쉼 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오.”
우보천리(牛步千里). 그는 감옥 안에서 스스로에게, 또 아내에게 이렇게 다짐하면서 학자의 길에 매진했다. “세상이 실로 무상함을 절감한 나로서는 비록 영어의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 정진할 것이오. 무위도식이나 허송세월은 나를 괴롭힐 뿐이오. 일각을 천금으로 여기고 한 순간 한 순간을 값 있고 뜻 있게 보내겠소.”
그를 이토록 학문연구에 집착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인생을 버티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한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나는 분단비극의 체험자로서 내가 살아온 인생여정을 가끔 되돌아볼 때마다 내가 자신하는 것은 겨레사랑의 민족주의라는 사실이오. 이것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운명의 길을 걸어왔을 것이오. 나는 시대나 겨레를 떠나서 내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소.”
그는 고등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서 충정과 이상,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분단시대의 한 민족적 지성인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1984년 남한 땅에 첫발을 디딘 그는 목포에서 부산까지 남해안을 누비다 거제도 해금강에서 어릴 때부터 동화 속의 그림처럼 마음에 간직했던 겨레의 꽃 ‘남해의 해당화’를 발견하고 한걸음에 달려가 꽃망울에 볼을 비비고 또 비벼댔다고 했다.
타향살이에서도 나라와 겨레를 잊지않고 미래를 설계하던 다른 열혈청년들처럼 베이징(北京)대학 3학년 시절 친구에게 보낸 연하장에 적은 위국헌기위지고(爲國獻己爲至高ㆍ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일이다)라는 칠언구는 인생의 좌표였다고 한다.
이런 인생관을 가진 그는 우리 민족의 교류사를 연구해 세계 속의 한국이란 민족사의 위상을 복원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법원도 원심 판결문에서 “개인적으로 정세분석 보고 이상으로 학문연구에 가치를 두었고, 이러한 행위가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학문적 열정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열정을 인정했다.
그는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는 삶의 화두를 스스로 만들고 안거(安居)를 나는 선승들처럼 학문에 몰두했다. 한국어를 포함, 동양어 7종과 서양어 5종 등 모두 12종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필요하다며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새로 시작하기도 했다.
책상이 없는 감방 안에서 두 다리를 포갠 채 글을 쓰느라 발등이 희끄무레하게 변색이 되고 하체가 거의 마비가 되면 간신히 일어나 어정어정 걸음을 걷다 다리에 생기가 돌아온 뒤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다양한 학문적 연마를 거쳐 문명교류학과 아랍-이슬람학, 두 분야에 집중한 그는 감옥에서 문명교류학 연구의 핵심인 실크로드학에 관해 200자 원고지 2만5,000매의 원고를 썼다.
2000년 8월 출옥한 후에는 <씰크로드학> <이븐바투타 여행기> 등 저서 및 역주서 등을 출간하면서 감옥에서 못한 실크로드 답사와 문명교류사 연구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이븐바투타> 씰크로드학>
▲정수일 연보
1934년 중국 옌볜 출생
49년 옌볜고급중학교
52년 베이징대학 동방학부
56년 카이로대학 인문학부
58년 중국외교부 근무
64년 평양국제관계대학 및 평양외국어대학 교수
82년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
84년 단국대 사학과 박사과정
88년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96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감
2000년 출감
▲저서
<신라-서역교류사> <세계 속의 동과 서> <기초아랍어>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문명교류사 연구>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이슬람문명>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한국 속의 세계(상.하)> <실크로드 문명기행>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 (공저), 역주서 <이븐 바투타 여행기(1.2)> <중국으로 가는 길> <왕오천축국전>왕오천축국전> 중국으로> 이븐> 실크로드의> 실크로드> 한국> 소걸음으로> 이슬람문명> 문명의> 문명교류사> 고대문명교류사> 씰크로드학> 기초아랍어> 세계> 신라-서역교류사>
■ 40일간 몽골·인도 답사 "신 실크로드 조명해야"
정수일씨는 지난 여름 40여일 간 몽골과 터키, 인도의 실크로드를 답사했다. 실크로드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미흡함을 느낀다는 그는 요즘은 '철의 실크로드'니, '경제 실크로드'니, '오일 실크로드'니 하는 이른바 '신실크로드'에 관해 특별한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다.
"몽골, 터키, 인도는 실크로드 3대 간선의 요지에 자리한 나라들로서 볼만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신실크로드'의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우리네 역사 문화와 관련이 있는 유물에 접할 때면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습니다. 분명 실크로드가 우리 한반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개념이나 기능을 새롭게 조명하고 정립해야 한다고 했다.
정씨는 지난해 여름 그를 따라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답사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실크로드학교에 큰 애착을 보이고 있다. 수강하는 이들은 여행을 하려는 사람, 해당 지역의 역사 문화를 알려고 하는 사람, 문명교류와 실크로드에 관심있는 사람 등 다양하다.
매 학기 한 번씩(1년에 2회) 실크로드 현장을 답사하며, 이를 위한 준비로 매달 한 번씩 답사할 나라나 지역에 대한 강의를 진행한다. 지난해 겨울에는 이란 페르시아루트, 지난 여름에는 터키 아타톨리아루트를 답사했으며 올 겨울에 서아시아 3국(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을 답사하기 위해 현재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정씨는 실크로드학교 외에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문명교류학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 <고대문명교류사> 속편으로 <중세문명교류사> 집필을 시작했다는 그는 번잡한 일상에 쫓기다 보니 진척은 더디지만 지식의 사회적 환원이란 본분을 조금이라도 다해보려는 생각은 놓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중세문명교류사> 고대문명교류사>
국내 이슬람 연구의 선구자인 그에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던 개신교 신자 납치사건에 대해 물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정부와 탈레반 사이에 맺은 합의서 내용은 연내 철군과 선교 금지 두 가지가 아닙니까. 이는 이 사건이 정치적 및 종교적 복합동기에서 발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공히 교훈을 찾고, 합의는 국제적 신의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사건의 전말을 지켜보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 아프간의 정세 등에 관한 우리의 이해와 판단이 너무나 어설프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옹골찬 전문가가 없습니다." 그는 언제까지나 남들이 마구 내뱉는 보도나 언설에 무턱대고 기댈 수는 없다면서 지적 축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많은 언어를 익힐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저는 언어전공자는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이곳 저곳에서 외국어 교육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공부하고 써보고, 또 가르치면서 얻은 경험이라면, 외국어란 취미를 가지고 꾸준히 해야 하고, 배울 기회와 환경을 능동적으로 적극 활용해야 하며, 정독과 다독의 결합 등 유효한 학습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어란 알면 아는 만큼 유익하지요, 세계에로의 지평이 넓어져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라고 답했다.
남경욱기자 kwn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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