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국문학계. 한 중진 교수가 다른 대학 젊은 교수의 논문을 그대로 베껴 학술지에 발표했고, 뒤늦게 사실을 안 젊은 교수는 신문에 공개했다. 일파만파로 번져 간 사건은 베낀 교수가 교직을 떠남으로써 일단락됐다. 학문적 표절(剽竊ㆍplagiarism)이 사회적 경종을 울린, 흔치 않은 사건이다. 빙산의 일각이었다. 연예계, 특히 가요계의 표절 시비는 비일비재하다.
‘내가 하면 인용, 남이 하면 표절’인가. 표절은 그래서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를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특히 인터넷 시대를 맞아 어디로 불똥이 튈 지 모르는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들여다 본 최초의 단행본 <표절> 이 나왔다. 2006년도 이화여대 국문과 대학원이 진행한 ‘한국 문학과 비교 문학’ 강의의 성과를 종합한 이 책은 그 동안 소논문의 형태로 간헐적으로 논의돼 온 표절에 대한 성찰로 받아들여 진다(집문당). 표절>
백소연 박사는 <왕의 남자> 와 <간 큰 가족> 등 최근의 흥행작에 대해 쏟아진 표절 의혹에 대해 “표절 문제가 문화적 측면에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긴밀히 유착해 생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표현은 다를지라도 구조나 전개 방식을 도용하는 ‘내재적 유사성’도 표절 판별의 기준”이라며 “아니면 말고 식의 스캔들 만들기 차원을 넘어, 표절은 심각한 범죄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간> 왕의>
최수현 박사는 일본 드라마 베끼기 현상을 짚었다. 최 박사는 “2004년 일본 대중 문화 4차 개방으로 일본 드라마는 대중화됐다”며 “판권을 구입해 리메이크하는 방식으로 표절 혐의를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관행이 고정화된다면 그로 인한 문화적 종속 현상은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또 국문과 김은주 석사는 <달자의 봄> , <외과의사 봉달희> 등 드라마의 표절 문제에 대해, 김아영 석사는 mㆍnet의 <조정린의 아찔한 소개팅> 과 미국 MTV의 등 국내 오락 프로들이 외국을 어떻게 베끼고 있는지를 밝혔다. 조정린의> 외과의사> 달자의>
한편 신윤경 박사는 한국 대중 가요 속의 표절 양상에 대해 논의, “표절자라는 주홍 글씨보다는 창작물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연세대 국문과 김혜연 석사는 국내 미술계의 잇단 표절 시비에 대해 “외워 그리기를 강요하는 미술계, 표절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없고 처벌도 미약한 제도적 결함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의를 총괄한 이혜순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명예 교수는 “표절은 법이나 상술에 의해 재단되기 전에 인문학적 성찰을 거쳐야 할 문제”라며 “새로운 창조의 동력으로 거듭날 길이 있는 지에 대해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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