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시이 신지 지음ㆍ서혜영 옮김 / 해냄 발행ㆍ428쪽ㆍ1만1,000원
엄청나게 키가 큰 자신을 낳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믿는 주인공 ‘나’는 조용하고 소리에 민감한 10대 소년이다.
조그만 항구 마을에 사는 소년의 식구로는 팀파니스트이자 동네 관악대의 엄격한 리더인 할아버지와, 1과 자신 만으로 나눠지는 숫자인 소수에 집착하는 괴짜 수학자 아버지가 있다.
무슨 사연인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각자 음악과 수학에 몰두할 뿐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데면데면하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완벽하게 흉내낼 줄 아는 소년은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관악대에 ‘목소리 연주자’로 참여하며 음악에 눈뜬다.
<그네타기> <쥬제페, 사로잡힌 남자 이야기> 등의 성장 소설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일본 작가 이시이 신지(41)는 <보리밟기 쿠체> 에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한 소년의 성장기를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보리밟기> 쥬제페,> 그네타기>
폭풍우에 쥐떼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마을 사람 전부가 음치가 되는 이변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항구 마을의 우화적 풍경은 커가는 소년의 심란한 내면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한다.
마을과 관련된 온갖 가십기사를 모티프로 독특한 연주곡을 만드는 사환 할아버지, 시력은 잃었지만 비범한 청력을 지닌 권투 선수 ‘나비 아저씨’, 불구의 몸에도 첼로 연주에 일가를 이뤄낸 음악 선생님 등 소년의 음악적 재능을 후원하는 인물들의 독특한 캐릭터는 성장소설 속 후견인의 전형성을 탈피하고 있다.
사기꾼에게 필생의 논문을 빼앗긴 것을 비관한 아버지가 자살하고,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비극적 과거가 드러나는 등 소년에게 심적인 위기가 닥칠 때마다 ‘쿵, 두둥, 쿵’ 하는 리드미컬한 발소리를 내며 찾아오는 미지의 인물 ‘쿠체’는 작가가 펼치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진경이다.
소년의 절실한 질문에 선(禪)적인 아포리즘으로 화답하며 그의 삶을 견인하던 쿠체의 발소리가, 음악 선생님의 수양딸 초록이를 마주한 소년의 심장에서 울릴 때, 독자는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도정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과 절묘한 은유를 만나게 된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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