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정조일까.(15매)
하필 정조(正祖ㆍ조선 22대 왕ㆍ1752~1800)일까라고 생각해봤다. 유난히 사극의 주인공으로 등장을 많이 하던 태종, 연산군, 선조 등을 제쳐두고 굳이 정조다.
양란(兩亂)을 겪은 후 상대적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시절의 임금인 그. 칭호에서 느껴지듯 ‘반듯’하기만 할 것만 같은 그를 그려서 얼마나 재미가 있겠다고 최근의 조선시대 사극은 빠짐없이 ‘정조의 드라마’다.
이번 주 시작된 MBC의 월화 사극 <이산> 과 내달 케이블방송 채널CGV에서 방영 예정인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 여기에 7월말 종영한 KBS의 <한성별곡-정> 까지 포함하면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같은 주인공을 둔 TV 사극 3편이 방송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정조일까. 한성별곡-정> 정조암살미스터리> 이산>
■ 어떤 왕보다 드라마틱한 삶 보내
정조의 사극출연 빈도가 잦아지는 이유를 분석하려면 우선 정조가 어떤 인물인지 바르게 아는 것이 필요하다. 정조의 이름은 산, 호는 홍재. 영조의 손자이며 흔히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세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드라마 제작자들이 “정조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군주도 없다”는 말로 입을 모으는 첫째 이유는 그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비참한 인생을 마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상당히 근대적인 기술로 화성을 축조하고, 천주교를 인정했으며 탕평책을 써 인재등용의 경계를 허물었던 진취적인 성향 또한 정조라는 인물을 드라마에 마땅한 캐릭터로 갈고 닦은 바탕이다.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한 정조는 보위에 오르면서 무엇보다 왕권강화에 힘을 쏟는데 이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치인들과 사사건건 부딪쳐가며 자신의 의지를 굳히는 지도자상을 보여준다. 정조가 자주 선택되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드라마 평론가로 활동하는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왕이라는 절대권력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이를 지키기 위한 정조와 그를 둘러싼 세력, 그리고 반대되는 세력간의 투쟁은 조선의 어떤 임금보다 극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정조라는 인물에 시청자가 끌리는 것이고 이를 아는 드라마 제작자들이 정조에 집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이유로 정조는 예전부터 알게 모르게 드라마 콘텐트에 숨어있었다. 2001년 방영된 사극 <홍국영> 에서 정조의 세자시절 고초가 전해졌고, 영화 <영원한 제국> 도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거는 인물로 정조를 묘사했다. 영원한> 홍국영>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의 제작진은 “왕과 신하의 권력 대립구도가 팽팽하게 이뤄지고 뿐만 아니라 양반과 상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거상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는 등 시기적으로 극적인 요소가 많은 시절이 정조 때”라며 “현대사회만큼 다양한 문화와 정치적 이슈가 난무하는 혼란기였던 점도 드라마에 걸맞는 시대로 받아지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한다. 정조암살미스터리>
■ 지금의 정치현실과 절묘한 댓구
뭐니 뭐니 해도 정조의 브라운관 출연이 반갑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현재의 정치상황에 대한 절묘한 댓구 때문이 아닐까.
당초 그 어떤 대통령보다 개혁적이던 노무현 정권의 모습이 대선을 앞둔 시점에 보자니 내외적인 이유로 초심을 잃고 국민의 기대에 호응하지 못한다. 이에 맞장구 치는 시청자들의 눈에 정조의 모습이 미묘하게 투영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산> , <한성별곡-정> ,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모두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는 진취적인 군주로 정조를 그린다. 특히 <한성별곡-정> 에서 정조는 똑똑하고 개혁적이지만 보수적인 신하들에 가로막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군주로 나온다. 한성별곡-정> 정조암살미스터리> 한성별곡-정> 이산>
즉, 개인의 능력은 출중하나 자신의 정치적인 비전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임금으로 나오는데 이와 같은 묘사 때문에 직접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의식해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지적도 많이 받았다.
실제로 당시 정조로 분했던 탤런트 안내상은 한 인터뷰에서 “연기를 하며 노 대통령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성별곡-정> 의 제작진은 혹시 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한성별곡-정>
세 드라마에는 부동산 투기, 수도 이전, 진보와 보수의 끝없는 싸움 등 시청자들에게 대선을 떠올리는 요소가 적절히 가미되어있다. 정조가 과거의, 혹은 기록 속에서만 살아있는 왕이 아니라 현대 정치에 의미를 부여하며 숨쉬는 캐릭터로 드라마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시대적인 유사성 때문에 용이할 수 있었다.
정석희 TV 칼럼니스트는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정조를 보면서 시청자의 입장에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정조와 그에 맞서는 세력을 보면서 지금의 정치 현실이 생각나기도 하고 대선 레이스에 나서는 후보들의 입장과 정조를 비교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산> 의 이병훈 PD도 사극에서 그린 정조와 현재 정치현실을 분리해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사극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의 정조는 우리가 현재 당면한 좌파와 우파의 갈등, 신세대와 기성세대의 불화, 사회문제로 심화된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지녔다. 이산>
정조는 조선의 왕 중 가장 열린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그가 당시 펼치려 했던 서얼철폐, 화폐개혁 등은 현대의 현실과 많이 닮아 있다”고 설명했다.
■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상과 닮아
왜 하필 지금 정조가 뜰까라는 의문에 가장 적합한 답은 아마도 ‘우리가 가장 원하는 지도자 상이 정조’여서가 아닐까.
대중매체가 생산하는 문화콘텐트는 알게 모르게 당시의 집권세력이나 민중의 희망을 담게 된다.
군사정권시절, 유난히도 수양대군의 정권찬탈을 묘사하는 드라마를 많이 제작해 부적절한 정권승계에 대한 시청자들의 의문을 달래줬고 경제위기가 지속되던 시절 영웅들의 이야기가 전파를 많이 탔던 점을 보면 이점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실학(實學)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돕고 열린 사고로 개혁의 정점을 달렸던 정조. 하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벽파(僻派)의 반대에 대응하다 끝내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쳤던 지도자의 모습을 현대에도 원하는 시청자와 드라마 제작자가 많기 때문에 정조가 뜨는 것이다.
윤석진 교수는 “정조는 여러모로 현시대가 원하는 군주상임에 틀림없다. 다만 점차 보수화 되어가는 한국사회에서 개혁성향이 두드러졌던 정조가 어필한다는 게 약간 의문이다”고 말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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