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이번 경선일정 거부는 1990년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의 당무거부 파동과 닮았다. YS는 3당 합당 후 자신이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과 함께 내각제 개헌에 합의해 서명한 각서가 공개되자 "나를 죽이려는 공작정치"라며 당무를 거부하고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YS를 따르던 민주계 의원들도 집단 반발했다.
YS가 각서에 서명한 것은 사실이었다. YS는 이게 공개돼 궁지에 몰리자 음모론을 제기하며 당 밖으로 뛰쳐나가 '업어치기'를 시도한 것이다.
손 전 지사가 경선 도중 세가 불리한 가운데 레이스를 중단하고 장외로 나가 구태 경선을 비난한 것은 이야기 구조가 YS의 케이스와 흡사하다. 1993년 대통령이 된 YS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입문한 손 전 지사로선 알게 모르게 YS식 정국돌파 방식을 체득했는지도 모른다.
YS는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룬다. 일거에 수세에서 공세의 위치를 점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부랴부랴 YS와 가까웠던 김윤환 의원을 내려보내 YS를 달래 당무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이후 민자당 내 주도권은 민정계에서 서서히 YS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이런 반전이 가능했던 것은 YS가 당내에선 소수파였지만, 민심을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른바 민주 대 반(反) 민주 구도가 유효하던 시절이었고, 비록 YS와 민주계가 3당 합당을 했지만 군부 세력인 민정계와 맞서고 있는 민주세력이라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고 있었다.
YS는 차기 대선후보 지지도 1위였고, 부산ㆍ경남이라는 확실한 지역기반도 있었다. YS는 이 같은 환경을 십분 활용해 자신을 군사정권에 의한 피해자로 부각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은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압박이 됐다.
그렇다면 손 전 지사도 성공할 수 있을까. 당장 여부를 판단하긴 어렵다.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확실한 여론동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손 전 지사의 입지는 YS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손 전 지사는 더 이상 범 여권 대선주자 중 일반지지도 1위 주자가 아니다. 더욱이 피해자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다. 한나라당 탈당경력은 그의 이미지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여론을 환기할 만큼의 세력을 이끌거나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론이 그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이번 경선일정 거부는 불리한 판세를 어찌해보려는 일탈행동, 마지막 몸부림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YS와 행태는 비슷하지만, 결과는 달라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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