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파리 기억은 2004년 12월의 것이다. 몇 회 앞서 얘기했듯, 화가 친구가 파리 유네스코 본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게 돼 거길 가본다는 핑계로 유럽 땅을 밟았다. 나는 다른 친구 셋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서 파리로 갔다.
변호사는 파리가 처음이었고, 시인과 철학자와 나는 이 도시가 구면이었다. 친구들과 보름 동안 머물면서, 나는 파리를 공정하게 볼 수 있는 거리를 얻어내게 되었다. 나는 파리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아주 하찮지만 내겐 상징적으로 보인 '사건'이 있었다. 생미셸 거리의 뤼테스라는 카페-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다가 종업원과 다툰 일이다. 동석한 친구들 가운데 하나가 빵에 바를 잼을 원해서 내가 잼을 주문했는데, 저녁 식사 때 잼을 주문하는 건 파리 식이 아니라며 종업원이 비웃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그 주문 자체를 무시했다.
나는 고객에 대한 예의를 그 친구에게 가르쳐야 했고, 그 친구는 누런 피부의 외국인에게 훈계를 듣기 싫어했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선을 넘었다. 파리 식이든 아니든 잼을 가져다 달라는 내게 그는 "프랑스어를 못 알아듣느냐? 당신들 어디서 왔느냐?"며 무례하게 버텼다. 나는, 화가 나,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왔는데 갈리아의 '촌것'(페크노)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로마 사람을 불러달라고 소리질렀다. 그리고는 내처 맥락과 아무런 상관없는 라틴어를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주절댔다.
"히스토리아 에스트 테스티스 템포룸, 룩스 베리타티스, 비타 메모리아이"(역사는 시간의 증인이고, 진리의 빛이고, 기억의 생명이다), "로마 로쿠타, 카우사 피니타"(로마가 말했으니 사건은 마무리됐다), "넥 아모르, 넥 투시스 켈라투르"(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 "한니발 아드 포르타스"(한니발이 바로 문간에 와 있다), "데우스 에스트 인 펙토레 노스트로"(하느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다) 따위의 말들.
■ 주문 무시하는 종업원에 라틴어로 '복수'
그것은 천박한 짓이었지만, 상대방의 천박함에 합당한 천박함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라틴어인 줄은 짐작했겠지만 그 뜻은 알 수 없었을(알았다면 웃음을 터뜨렸으리라) 갈리아인 웨이터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어디론가 사라졌고(제 적대자가 자신에게 던진 이방언어의 뜻을 알 수 없으면 최악의 욕을 상상하게 되는 법이니), 다른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을 맡게 되었다. 로마인 같지는 않았지만, 그는 앞선 갈리아인보다 예의발랐다. 그리고 마침내 잼이 왔다. 그게 파리의 관행은 아니었겠지만.
이 카페-레스토랑의 옥호 뤼테스(Lutece)는 파리의 시테 섬 주변에 있었던 로마시대의 취락공간 루테티아(Lutetia)가 프랑스어의 옷을 입은 것이다. 그래서 뤼테스는 더러 파리의 이명(異名)으로도 쓰인다. 비교가 아주 날씬한 것은 아니지만, 파리 한 복판의 카페-레스토랑 뤼테스는 그러니까 서울 한복판의 '한성(漢城) 식당'과 비슷하다.
나는 허기진 산책자로서 파리에 사는 동안 '뤼테토필'(lutetophile: '파리애호가'라는 뜻으로 내가 만들어본 말이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이런 조어를 용납할지는 모르겠다)을, 자임했다. 그런데 다섯 해만에 찾은 파리에서, 그것도 뤼테스라는 옥호를 지닌 식당에서 유쾌하지 않은 일을 겪고 나니, 뤼테토필을 자임하는 게 쑥스러워졌다.
사실 뤼테스에서의 일은 내 '변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들먹인 것에 불과하다. 꼽아보니 내가 파리에서 맞은 12월은 그 때가 일곱 번째였는데, 왠지 예전만큼 이 도시가 정겹지 않았다. 꼭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름 한 철을 빼면, 파리 날씨는 대개 을씨년스럽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에 파리에 살 때 이 도시의 노숙자들은 도시의 한 풍경 같았는데, 2004년 12월엔 그것이 더 이상 풍경으로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노숙자로 사는 것마저 예전보다 더 팍팍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표정이 더 강퍅해졌다고 느꼈다.
지하철에 지천으로 붙은 영어학원 광고물들을 통해 파리 사람들은 영어가 성공의 열쇠임을 이제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었다. 몽마르트르의 '거리의 화가'들은 테르트르 광장에 터를 잡고 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관광객들을 쫓아다니며 거래를 시도했다. 행인들의 발걸음도 예전보다 더 빨라졌다, 고 나는 넘겨짚었다. 아무튼 파리는 바빠 보였고, 예전보다 더 깍쟁이가 된 것 같았다.
■ 스테이크 맛 빼고는 옛 느낌 찾을 수 없어
그래도 나는 다시 찾은 파리에서 옛 느낌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대뜸 떠올린 방법은 내 발걸음이 짙게 닿았던 곳들을 다시 둘러보는 것이었다. 나만큼이나 게으른 친구들을 살살 꾀어서, 그게 끝내 여의치 않을 땐 혼자서, 나는 파리의 여袖該綬?돌아다니며 내가 뤼테토필이었을 때의 기억을 되찾으려 애면글면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몽마르트르에서도, 뷔트쇼몽에서도, 생미셸에서도, 몽파르나스에서도, 생루이 섬에서도, 뤽상부르공원에서도, 바스티유광장에서도, 페르-라셰즈 묘지에서도 나는 옛날의 나를 찾을 수 없었다.
한 달에 두 번씩은 중국 슈퍼마켓에서 찬거리를 사기 위해 찾았던 벨빌은 나의 벨빌이 아니라 그저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의 공간일 뿐이었다. 명정 상태로 거리의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던 레알도 나의 레알이 아니라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의 공간일 뿐이었다. 파리의 이 구석 저 모퉁이를 걸을 때, 나는 산책자가 아니라 발자크나 모디아노의 독자에 지나지 않았다. 향수> 자기>
그래도 위안거리가 있긴 했다. 혀에 닿는 것들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몽파르나스는 그 중산층 분위기 때문에 내게 썩 편한 곳은 아니었지만, 다니던 학교가 그 근처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다.
지하철 바뱅 역 앞의 카페 라로통드와 거기서 두 블록쯤 떨어진 곳의 카페 로리종이 내 파리 시절의 일상적 휴식처였는데, 라로통드의 안심스테이크와 무통 카데 와인도, 로리종의 크로크마담 샌드위치도 맛이 그대로였다. 햄버거 체인 퀵의 '제앙'(자이언트)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을 먹고 마실 때, 나는 문득 예전의 나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느낌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나는 파리를 새로 사귀기 위해서 예전에 안 하던 짓도 해 보았다.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나는 변호사와 함께 회전목마를 탔다. 강베타 광장의 한 담뱃가게에서 나는 시인과 함께 즉석복권을 샀다. (물론 꽝이었다.) 파리에 살 땐 발도 들여놓지 않았던 서쪽 교외의 부자 코뮌 뇌유-쉬르-센(지금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22세 때 이 곳 시의원 노릇을 하는 것으로 정치적 커리어를 시작했다)을, 나는 시인과 철학자를 모시고 고샅고샅 걸었다.
또 시인이 예전에 한 번 가보았다는 오데옹 근처의 CD점 '디스크 킹'을 찾아내 콤팩트디스크를 몇 장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파리와의 사이는 데면데면해졌다.
어쩌면, 2004년 겨울에 내가 파리를 스스러워 했던 것은 그저 그 곳에 살고 있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1992~93년에 내겐 시테 위니베르시테르라는 기숙사가 있었다.
그 이듬해 파리에 가서 몇 년 살 땐, 피레네 거리의 아파트가 있었다. 그러나 2004년 겨울엔, 나흘은 소르본 근처 호텔에 묵었고 나머지 열흘은 화가 친구의 지인 집에서 신세졌다. 파리에서 잠자리가 불안정한 것은 내게 낯선 경험이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내가 그 곳의 관광객이었다는 사실이, '신포도의 심리학'을 통해서, 나로 하여금 파리를 흠잡게 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파리랑 영영 서먹서먹해지고 싶진 않다. 언젠가 뤼테토필로 돌아가고 싶다. 에드거 앨런 포와 이상(李箱)이 평생 그리워했으면서도 결국 가보지 못한 도시를 깔보는 것은 내 분수에 좀 넘치는 짓 같다.
■ 장기체류자 아닌 관광객이라 그랬을 수도
화가 친구의 전시회는 성황리에 열렸다. 로마와 파리 미술 평단의 거물이라는 사람들도 얼굴을 보였고,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 부부도 발걸음을 했다. 친구는 한국에서보다 유럽에서 더 편안해 보였다. 그의 행동거지는 상상 속 파리의 아치(雅致)와 잘 조화되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나도 사교계에 한 발을 걸친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서울이 그리웠다. 2004년 겨울만큼, 파리에서 서울을 그리워한 적은 없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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