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과 미술계의 대표적 중진 최인호(62), 김점선(61)씨가 서화 에세이집 <꽃밭> (열림원 발행)을 함께 펴냈다. 최씨가 월간 <샘터> 에 연재하는 가족 소설, 신문ㆍ잡지에 기고한 칼럼 등 최근 10년 간 쓴 글을 묶고, 여기에 암 투병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고 있는 김씨의 그림을 곁들였다. 샘터> 꽃밭>
14일 서울 한남동 최씨의 작업실에서 걸쭉한 입담의 두 사람이 마주앉아 가족, 인생, 예술 등 이번 책의 화두들을 화제로 올렸다. 최씨는 한 살 아래의 김씨를 친근하게 ‘점선 누나’라고 불렀다.
■ 인연…2004년 첫만남 후 오누이처럼
최인호(이하 최)=우리 처음 만난 때가 2004년 에세이집을 함께 만들면서였지? 평소 누나 작품을 좋아해서 출판사에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했지. 이번에도 부탁했다가 아프다기에 안되겠다 싶었는데 흔쾌히 그려줘서 고마워. ‘그린이의 말’도 진짜 좋았어.
김점선(이하 김)=최인호씨가 내게 오누이라고 하는 게 실감이 안가. 연배는 같지만 이 사람은 일찍 등단해서 대학생 땐 이미 동세대의 우상이었거든. 나이 들수록 책이 더 잘 팔리니 ‘오래 가는 랭보’ 같은 사람이지. 나는 마흔도 넘어서야 알려지기 시작했고, 지금도 혼자 있을 땐 화가라는 것도 잊어버려.
최=나도 똑같아. 가끔 아내한테 내가 유명하냐고 묻곤 해.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는 핀잔이 돌아오지만. 아직도 나를 보겠다며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신기해.
■ 꽃밭…인생은 아름답다고 외치더라
최=꽃밭이 가장 눈에 띄고 소중한 것의 은유라면, 가족이야말로 신이 주신 꽃밭이지. 잡지에 30년 넘게 가족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지.
김=내게 꽃밭은 컬러(color)야. 어떻게 이리도 경이로운 색이 나올까 하는 무생물적인 관심. 어렸을 때도 크레파스 뚜껑을 열 때마다 느끼는 황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최=일전에 내몽골의 오르도스 평원에 갔는데 그곳에도 들꽃이 있더라고. 누가 봐주지도 않는데 정말 예쁘게 피었더라. 어디선지 모르게 나비랑 벌도 날아오고 장관이 따로 없어. ‘인생은 아름답다고 죽도록 말해주고 싶어요, 하고 말하며 꽃들은 죽어간다’는 플로베르의 시가 떠올랐지.
김=지난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심하게 아팠지. 수술 받고 첫 항암주사 맞는 날, 베란다에 있는 제라늄 생각이 나더라고. 링거를 꽂은 채로 병원을 탈출해 물을 듬뿍 주고 왔지. 경비 아저씨가 다 나았냐고 묻다가 링거병 보고 입을 다물더라.
■ 컴퓨터…난 컴맹인데 누나는 싸이질까지?
최=컴퓨터를 켤 줄도 몰라. 여전히 만년필, 원고지를 써. 한국일보에 <상도> 연재할 때 악필 원고를 매번 받아준 담당 기자한테 늘 미안해. 휴대폰 문자 메시지도 보낼 줄 알지만 컴퓨터는 안써. 원고지에 쓰면 사랑하는 여자 껴안듯, 쓰려고 하는 테마를 그러안는 느낌이 들거든. 상도>
김=난 다 할 줄 알아. 컴퓨터로 그림 그리고, 싸이도 하고. 아들에게 배웠거든. 예전엔 어른이 젊은이를 가르쳤는데, 거꾸로 아들에게 배우니까 영생하는 느낌이랄까. 우리 아들도 내가 작업하는 걸 보면서 역시 화가는 다르다는 걸 알겠다더군. 당연하지. 비록 55세도 넘어서 디지털을 배웠지만 내겐 아날로그 작업 30년의 연륜이 있거든.
최=청소년문학상 심사위원을 맡았을 적 일인데 한 학생이 허드슨강, 폴, 메리 운운하는 글을 썼더라고. 그 학생한테 “뉴욕 다녀온 적 있냐”고 물었더니 없대. 영화에서, 인터넷에서 본 이미지를 갖고 자판 위에서 손이 춤춘 거지. 요즘 젊은이 글에선 컴퓨터 냄새가 너무 나.
김=21세기는 첨단 문명의 시대, 일테면 빌 게이츠, 스티븐 잡스 같은 이들의 시대라고 잔뜩 기대했었잖아. 하지만 세기 벽두에 터진 첫 사건이 조앤 롤링이야. 이 스코틀랜드 작가가 카페에 앉아 손으로 쓴 <해리포터> 가 온 인류를 강타했지. 해리포터>
■ 예술…세상의 시선이 굴레, 벗어나고파
최=작가란 시대의 눈치를 살피면 안돼. 먼 미래의 눈으로 지금을 보는 것이 옳은 태도다. 이번 책에 시론을 거의 넣지 않았는데 쓸 땐 통쾌했지만 지금 보니 다 죽은 글이었거든.
김=하지만 밀림이 아닌 문명 속에 사는 이상 저도 모르게 조율 당하는 측면이 있지. 나도 내 글을 보면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보다 훨씬 못되고 날카로운 사람인데’하는 생각이 들거든. 그래도 그림은 그걸 사줄 한 사람만 열광시키면 되지만, 글은 누구나 다 아는 언어로 감동을 끌어내야 하니까 시대에 순치되기 쉬운 것 같아.
최=‘최인호’ 하면 떠오르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 채 글을 쓰고 싶어. 그동안 써온 작품, 이에 대한 비난, 칭찬, 관심 등등…. 혼자 어두커니 있다가 고독이 흘러 넘칠 것 같은 순간에 쓰는 글! 그게 원고지 3매짜리 글일지라도 그 순간을 놓치면 억울할 것 같아.
김=필명 만들어서 다시 데뷔해(웃음). 날더러 씩씩하다지만 정작 난 매일같이 자살하고 싶다니까. 더 나은 작품을 그리지 못한 채 지는 해를 보는 기분이란…. 같이 단풍을 보더라도 누구는 “예쁘다”고 감탄하면 끝이지만 화가는 그 때부터 괴로워지지. 저 아름다움을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때문에.
최=모네도 죽어가는 아내를 보면서 온전히 슬퍼하지 못한 채 아내 얼굴 위 빛의 변화를 관찰하는 자신을 발견했다지. 나도 누님들이 돌아가셨을 때 글을 쓰기 위한 감정적 여력을 남겨두려면 100% 슬픔에 잠길 수 없음을 깨달았어. 그게 예술가의 저주 받은 운명인 것 같아. 그럼에도 우린 삶이란 찬란한 꽃밭에 살고 있음은 분명하지.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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