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에는 아이울음 소리를 듣게 됐어. 종가에 30여년만 맞는 경사야, 경사.”
조선의 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경북 안동 종택을 지키는 15세손 이동은(99)옹은 요즘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진다. 올해초 시집 온 손자 며느리 이현주(31)씨가 지난달 20일 증손자인 18세손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 종택에는 15∼18세손 4대가 10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살게 됐다.
올들어 퇴계 종가는 손자가 결혼을 하면서 경사가 시작됐다. 7년여동안 여자라고는 일하는 아주머니 밖에 없던 종택에 올초 종부가 신접살림을 차리면서 집안에 웃음꽃이 퍼졌다.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유교철학과 관련된 박사 논문을 준비중인 17세손 치억(32)씨는 6년간의 교제끝에 현주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현주씨는 미국 보스턴대에서 화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재원으로 귀국후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로 영어 강사를 하다 당시 일어강사였던 치억씨를 만나 사랑을 키워왔다.
두 사람은 3년전 혼담이 처음 오갔지만 박사과정에 있던 치억씨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미뤄오다 올해서야 혼례를 올리게 됐다. 종부가 결혼 직후 신접살림을 종택에 차리면서 가장 먼저 맡게 된 것은 곳간 열쇠다.
시어른 식사 상에 된장찌개를 빼놓지 않는 것부터 시댁 풍습과 살림살이를 배우던 종부는 외국 관광객이 종택을 찾을 때마다 영어로 시댁의 내력을 설명해 어른들을 흐뭇하게 했다. 7월4일 이동은 옹의 99번째 생일상도 차리고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술잔도 올리는 등 수년간 비어있던 종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퇴계 종택에 안방마님인 종부가 자리를 비운 기간은 7년이나 됐다. 이 옹의 부인 김태남 여사가 2000년 89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종택에는 3대에 걸친 종손만 남게 됐다. 16세손 근필(75)씨의 부인은 시어머니보다 7년 먼저 세상을 등지면서 종택 살림살이는 20여년째 부엌일을 하고 있는 안연순(55ㆍ여)씨의 몫이 됐다.
이 무렵부터 종택에서는 종부를 맞이하는 일이 집안의 대사가 되었지만 “한해 제사만 20회 가까이 있는 종택에 누가 시집오겠느냐”며 우려가 컸다. 실제 퇴계 종택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해에 퇴계선생과 고조부까지 4대에 이르는 조상 내외, 동은ㆍ근필 옹의 부인까지 기제사만 17번이었고 설에는 떡국, 정월대보름 찰밥, 칠월칠석 국수, 동짓날 팥죽까지 차례상을 차려야 했다.
이 옹은 증손자의 이름을 이석(怡錫)이라고 직접 지었다. 주변에서는 손자며느리가 서울 친정에서 해산을 하는 바람에 이 옹이 아이 얼굴도 아직까지 보지 못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표정이 밝고 여유로워졌다고 한다.
치억씨는 “처가 종부의 역할을 잘 해낼 것으로 믿는다”며 “안동에서 뿌리를 내리고 우리 시대에 맞는 유학을 학문과 생활에서 널리 보급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대구=전준호 기자 jh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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