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의 말은 매우 정확하고 논리적이었습니다. 받아 적으면 수정할 필요 없는 문장이 될 정도였죠. 덕분에 그의 말을 통역할 때는 머리 쓸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국가 수반을 만나본 한 동독 외무장관도 ‘논리적 사고력이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 하나’로 꼽더군요.”
10월 초순까지 머물기로 하고 한국을 찾은 독일의 한국문학 번역가 헬가 피히트(73)씨는 1967~1989년 구동독의 일급 한국어 통역가로 활동하며 10여 차례 북한 김일성 주석의 수행 통역을 맡았던 인물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하는 ‘제1회 세계번역가대회’ 참석차 방한해 13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을 찾은 피히트씨는 칠순의 나이가 무색한 정확한 기억력으로 구동독과 북한을 오간 22년의 통역관 생활을 회고했다.
구동독 훔볼트대학의 첫 한국학과 입학생이자 졸업생인 그는 재학 당시였던 55년부터 1년 간 평양의 동독 대사관으로 통역 지원을 나가면서 한국어 통역관의 첫 발을 뗐다. 김 주석의 통역은 67년 주북한 동독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처음 맡았다.
피히트씨는 86년 동독에서 김 주석과 에리히 호네커 수상이 정상회담과 별도로 가진 4시간 밀담에 동석한 것을 그 동안 담당한 고위급 통역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면담 후 내가 작성한 보고서가 아무리 수소문해도 없어 불완전한 기억 뿐”이라고 운을 뗀 그는 두 분단국 지도자가 분단 체제의 지속 여부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고 회고했다. “동독은 100년 이상 갈 것”이라는 호네커와 “하루 빨리 통일해 분단을 끝내야 한다”는 김 주석이 팽팽히 맞서다가 “서로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선에서 절충했다는 것.
김 주석과의 ‘개인적 인연’을 묻는 질문에 피히트씨는 동독 정부 대표단 방북 때 김 주석이 토끼가 거북 위에 앉은 형상의 조각을 자신의 선물로 따로 마련했던 일과 89년 마지막 고위급 통역이었던 한 오찬회에서 건배를 제의하며 “통역 잘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던 일을 떠올렸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일화도 소개했다. 89년 방북한 동독 정부 대표단장이 북한의 차기 후계자로 꼽히는 김 위원장과 친분을 쌓으려고 두 차례 살갑게 말을 붙였는데 그때마다 김 위원장은 “예, 감사합니다”만 거듭했다는 것. 피히트씨는 김 위원장이 동독에 유학해서 독일어에 능통하다는 설에 대해 “실제 동독에 온 것은 김일성의 3남인 김영일로, 두 사람 모두 독일식 영어 이름 표기가 ‘Kim Jong Il’로 같아 나온 오해”라고 말했다.
60년대 후반 월북 소설가 이기영, 송영의 작품 번역을 시작으로 한국문학 번역가로 활동 중인 피히트씨는 98년부터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 를 번역 중이다. 나남출판사에서 나온 21권을 원본 삼아 현재 8권 분량(독일어판으론 4권)까지 번역했고 이 중 3권을 출간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에 관심을 가져온 학자로서 해외에 한국 문화를 알리려는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이라며 “힘닿는 데까지 계속 번역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토지>
이훈성기자 hs0213@hk.co.kr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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