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에 걸친 외교관 생활을 접고 올해 4월 교수로 변신한 ‘시인 장관’ 리자오싱(李肇星ㆍ66) 전 중국 외교부장이 모교인 베이징(北京)대에서 첫 강의를 했다.
외교부장 재직 당시 기자회견 때마다 시 한 수를 읊조리며 외국 특파원들의 예봉을 절묘하게 피해간 그답게 5일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에서 마련한 첫 강좌도 시와 관련한 화제로 시작했다.
리 전 부장은 성당(盛唐) 시대의 인물로,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더불어 ‘중국 3대 시인’으로 추앙받는 왕유(王維)의 산수론(山水論)를 화두로 잡았다. ‘국제정세관찰’이라는 주제의 이날 강의 내용을 그는 산수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설파한 산수론을 인용해 풀어 나갔다.
“지난 이틀간 산수론을 탐독했다. 산수론의 뜻에 따르면 그림 속의 산은 열 자의 긴 안목으로 봐야 하고 나무는 한 자의 눈으로, 말은 한 치로 살펴야 하며, 사람이라면 그의 표정과 동작, 품격을 세세히 따져야 한다.”
왕유가 제시한 산수화를 보는 4가지 방법을 대입하면 복잡한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이날 강의의 골자였다. 국제정세를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적인 시각으로 정밀하게 관찰하면 합당한 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강의가 2시간 동안 진행됐지만 학생들은 전혀 지루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이날 외교 전선에서 활약할 당시 겪은 풍부한 사례를 들려 주며 까다로운 상대에 대처하는 방법을 전수했다. “대표단을 이끌고 미국과 협상한 적이 있다. 현안이 많아 미국 측이 위안화 환율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불쑥 이 문제가 제기됐다. 하지만 나는 바로 반응을 보이는 걸 자제했다.
위안화 문제에 대응하면 정치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둘러 댔다. ‘문화대혁명 때 우리는 사물을 판단하면서 좌가 아니면 모두 우로 간주했다.
심지어 농작물까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로 편을 가를 정도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문혁’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는데 미국이 극단적인 ‘문혁’식 논법으로 위안화 문제를 다루면 되겠느냐고 반문해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했다.”
리 전 부장은 60년대 중국을 찾은 외국 방문단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공부나 일에서 상식적인 문제를 확인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서는 안된다고도 충고했다. 당시 외국 대표단은 자신들을 맞은 중국 외교부 관계자에게 중국의 인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정부가 제대로 통계를 내지 못하던 시기인 만큼 그 관계자는 대략 6억, 7억명 정도 된다고 무심결에 대답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외국 대표단이 “중국은 정말 위대한 것 같다. 인구도 말 한 마디로 1억명이 왔다 갔다 하니 말이다”며 비아냥거리듯 일침을 가했다.
리 전 부장은 이를 우스개 소리로 여기지 말고 남을 설복하기 위해 정확하고 다양한 근거와 논법을 사용해 주장을 입증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산둥(山東)성 출신인 리자오싱은 64년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외국어대학원을 67년까지 다녔다. 98년부터 2001년까지 주미 중국대사를 지냈으며 2003년 3월부터 올해 4월 27일까지는 중국 외교부장을 역임했다.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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