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25> 파리(中)-허기진 산책자의 세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25> 파리(中)-허기진 산책자의 세월

입력
2007.09.12 00:05
0 0

파리에 두 번째 간 것은 1994년 2월이다. 그보다 한 해 반 전 이 도시에 처음 간 건 직업 훈련을 위해서였지만, 이번엔 무작정 살기 위해서였다. 파리로의 이 ‘회귀’는 93년 6월 파리발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이미 결정됐는지도 모른다.

아홉 달 동안 파리에 머물며 나는 단단히 바람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 도시에 중독돼 버린 것이다. 그 아홉 달 동안 파리는 내 마음을 식민지화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몇 푼의 스칼러십으로 멀쩡한 아시아인을 유사 유럽인으로 구부려놓는 데 성공했다.

파리로 가는 데 아내는 대찬성이었다. 그녀도 아홉 달 동안 나처럼 바람이 잔뜩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될 참이었던 큰아이는 삶의 터전이 바뀌는 걸 내키지 않아 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뜻을 무시했다.

그것은 내가 아비로서 그 아이에게 저질러온 큰 잘못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될 참이었던 작은아이는 아무래도 좋다는 쪽이었다. 다수결의 폭력을 통해, 네 식구는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그 전에, 나는 다니던 신문사에 사표를 냈다. 그러나 그 신문사와의 협력 관계는 그 뒤 두 해 동안 더 이어졌다. 내가 파리에서 써 그 신문에 실린 기사 끝에는 아무개 파리 주재기자라는 직함이 붙었다.

내부적으로는, 그 신문사 사원이 아니었다. 적어도 정규직 사원은 아니었다. 두 해 뒤 그 신문사는 정규직 사원을 파리 특파원으로 보냈고, 나는 한 시사주간지의 파리 주재 편집위원이라는 직함을 얻어 생계를 이어나갔다. 역시 비정규직이었다. 94년 2월 파리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내 삶은 무를 수 없는 ‘객원’의 길로 들어섰다.

생활은 쪼들렸으나, 나는 파리에서 편안했다. 어느 정도 편안했느냐 하면, 내가 파리에 있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내 파리 체류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이 내 ‘커리어’와 무관한 빈둥거림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것은 빈둥거림이었고, 일종의 허송세월이었다. 그러나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나는 파리에서 세월을 허송하는 게 좋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늙어죽을 때까지 그러고 싶었다.

파리가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자들’ 시절만큼 자극적인 행복은 없었지만, 파리는 내게 꼭 맞는 옷 같았다. 그 전에 35년을 산 서울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파리는 내 마음을 식민지화했다고.

그 도시의 거리들, 광장들, 골목들, 묘지들, 시장들(파리엔 그 때까지도 재래시장이 여럿 남아있었다. 아마 지금도 그러리라), 카페들이 눈에 선하다. 내가 파리에 산 기간은 5년이 채 안 되지만, 그 두세 배를 산 사람이라 해서 그 도시 구석구석을 나보다 더 잘 알까 싶다. 택시 기사들을 빼곤 말이다. 내가 총명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세월을 허송했기 때문이다.

그 허송의 큰 부분은 걷는 것이었다. 서울에 견주어 워낙 작은 도시이기도 했지만, 파리는 걷기를 유혹하는 도시였다. 오밀조밀한 볼거리들만이 아니라, 그 도시의 공기 전체가 걷기를 유혹했다. 그 공기는 아마 내가 상상 속에서 재구성한 이 도시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었다.

■ 눈에 선한 거리·광장 산책이 일과

도시 한쪽 끝에서 맞은 편 끝까지 걷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동쪽 끝 포르트 드 몽트뢰유(근처에 벼룩시장이 있다)에서 서쪽 끝 포르트 도핀까지, 다른 날은 북쪽 끝 포르트 드 클리냥쿠르(역시 근처에 큰 벼룩시장이 있다)에서 남쪽 끝 포르트 도를레앙까지, 나는 이것저것 해찰하며 느릿느릿 걸었다. (‘포르트’는 프랑스어로 ‘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이 들어가는 동네나 지하철역은 시 경계에 있다.) 어느 땐 그저 가로지르는 게 심심해, 시를 둘러싼 환상도로(페리페리크)를 따라 파리를 반 바퀴쯤 돌기도 했다. (한 바퀴를 다 도는 건 내 체력으로 불가능했다.)

파리는 대체로 서쪽 남쪽이 부자 동네고, 동쪽 북쪽이 가난한 동네다. 몽파르나스와 몽마르트르가 그 남북의 분위기를 대표한다. 북쪽의 몽마르트르는 뮤직홀, 술집, 음악카페, 유곽, 섹스숍이 몰려 있는 파리의 홍등가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곽과 섹스숍으로 후줄근한 환락가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걸어 10분 정도 거리의 피갈 구역에 있다.

무명 예술가들의 공간 몽마르트르와 탐욕스러운 환락사냥꾼들의 공간 피갈이 나란히 붙어있는 것이다.) 반면에 몽파르나스에는 중산층의 반듯한 일터와 거주지가 몰려있다. 몽파르나스에 부유한 사람들의 밝고 밋밋한 낭만이 흐른다면, 몽마르트르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의 어둡고 병적인 낭만이 흐른다.

몽마르트르에 살며 그 곳 풍경을 화폭에 담은 화가들 가운데 내 마음을 가장 저릿하게 하는 이는 툴루즈 로트레크다. 그는 소년 시절 말에서 두 차례 굴러 떨어진 탓에 거동이 불편했고, 30대 이후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툴루즈 로트레크는 둔한 몸을 이끌고 몽마르트르의 지저분한 골목과 언덕들을 누비며 그 곳의 부평초 인생들을 예술사에 편입시켰고, 그럼으로써 미술사의 19세기 장(章)에 제 이름을 또렷이 새겼다. 몽마르트르가 또 다른 주정뱅이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고향이라는 것도 적어 두기로 하자.

■ 로트레크 ‘몽마르트르의 영혼’ 그려

한 도시를 한없이 헤집고 다니다 보면, 덜 좋은 곳과 더 좋은 곳이 생기게 마련이다. 젠체한다고 탓해도 할 수 없지만, 나는 동쪽과 북쪽의 서민 구역에 한결 마음이 쏠렸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도 동쪽 끝 20구에 있었다. 20구는 프랑스 영화에서 흔히 노동자 거주 지역으로 등장한다. 통계를 보지는 못했으나, 내 눈엔 토박이 프랑스인보다 이민자가 더 많이 사는 듯했다. 그 이주민들의 다수는 북아프리카 사람들과 포르투갈 사람들이다.

집 근처의 나시옹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공화국 광장과 동역(東驛) 북역(北驛)을 거쳐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 테르트르 광장까지 다녀오면, 칭찬받을 일이라도 해낸 듯 마음이 뿌듯했다.

집앞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피레네거리를 따라 뷔트쇼몽 공원에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비탈 위에 만들어진 뷔트쇼몽 공원은 뤽상부르 공원이나 튈르리 공원만큼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이들 공원보다 더 자연에 가까워서 마음이 편했다.

맨몸의 상체를 드러낸 채 여름 햇살을 쬐는 여자들 옆을 무심한 체 지나치는 것도 재미였다. 뷔트쇼몽 공원에서 내려와 벨빌의 차이나타운을 걸으면, 문득 내가 중국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파리에는 벨빌말고 남동쪽 13구에도 차이나타운이 하나 더 있다. 그 쪽 중국인들이 조금 더 ‘있어’ 보인다.

벨빌구역은 1871년 파리코뮌 당시 파리시민군과 베르사유군(정부군) 사이에 최후의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그 곳에서 사로잡힌 코뮌 전사들은 근처의 페르-라셰즈 묘지로 끌려가 즉결처분을 당했다. 그 즉결처분 장소는 지금 ‘코뮌전사의 벽’으로 불리고 있다. 그 벽 근처의 묘역에는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묻혀 있다.

파리코뮌은 실패한 혁명이었지만, 바로 그 실패를 통해서 역사상 가장 순정한 혁명의 이미지를 얻었다. 마르크스에서 하워드 진에 이르는 수많은 비순응주의자들이 파리코뮌 두 달을 인류사의 이상적인 시공간으로 미화했다. 어쩌면 그들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두 달이 두 해가 되고 20년이 됐어도 혁명은 여전히 싱싱했을까? 프랑스혁명의 예를 보든 러시아혁명의 예를 보든, 아니었으리라는 데 거는 게 더 안전할 것이다.

■ 파리코뮌 실패불구 ‘순정한’ 이미지

1997년에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파리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그 곳에 간 것은 그저 거기 살기 위해서였으니까. 파리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은, 그것이 내 아이들에게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잠재울 만큼 이기적으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욕망도 경제현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외환위기가 터져 원화의 값어치가 반으로 동강나면서, 집세를 포함한 내 가족의 생활비는 두 배로 뛰었다. 내 수입원의 대부분이 서울에서 오는 원고료였던 탓이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겉멋에 들려 파리사람인 양 살았지만, 내 알량한 허영심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온 것은 서울이었음을. 나는 파리에 살면서도 뿌리를 서울에 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파리에 떠있는 서울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곧 내가 지르는 비명이었다. 몇 달을 버텨내지 못하고 나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대중씨가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