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 다산초당조선의 르네상스 연 正祖… 왕 독살설로 본 역사 이면
1796년 오늘 수원 화성 창건공사가 끝났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1752~1800)가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뒤 성 축조공사를 시작한 지 2년 6개월만이었다.
화성은 정조가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임진왜란 후 그 필요성이 절감된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 극심한 당쟁을 타파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치적 목적, 신도시 건설이라는 경제적 목적까지 충족시키려 했던 야심찬 계획이었다. 당대 동서양의 과학기술이 총결집됐고 체재공과 정약용 등 실학자를 비롯해, 김홍도를 포함한 예술가 등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화성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화성 건축 등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으나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죽은 정조. 최근 그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양주와 장단 등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기도 했다.
이를 본 노인들이 슬퍼하며 '상복을 입은 벼'라고 말했는데, 그 얼마 후 대상이 났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할 정도로 백성을 사랑했던 개혁 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은 점차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사망과 함께 전개된 세도정치는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수구 정치 체제였다. 사실상 조선의 멸망이었다."
역사학자 이덕일(46)은 <조선 왕 독살사건> (2005)에서 정조의 죽음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책은 조선의 역대 왕 27명 중 정조를 포함한 8명의 독살설을 둘러싼 의혹을 따라가면서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조선>
저자는 당쟁의 격화로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결과 조선 왕 4명 중 1명 꼴로 독살설에 휘말렸다며, 조선이란 정치 체제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정조가 10여년만 더 살았더라도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촉발시키는 책이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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