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말의 태양볕은 따가웠다.
그 날 강화의 최고 기온은 30.3도. 여자 넷이 강화도 북단을 걷기 시작한 오후 두 시 반에는 조금 떨어졌겠지만 세 시까지도 30도가 넘었다(기상청 관측). 땀이 물처럼 흘렀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 더운 줄 몰랐다. 오른쪽으로는 개펄과 바다가 펼쳐졌고 그 너머 북한 땅 개풍군의 민둥산이 따라왔다.
찌는 듯 더운 날도 이렇게 좋은데 선선한 가을이나 따뜻한 봄날은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칼칼한 겨울은 나쁘랴 싶었다.
넷 가운데 하나는 한의사 이유명호씨로 강화도 순례길을 만드는 운동을 한다. 전단 뿌리고 확성기 들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 걷는 운동이다. 걸어서 이 길을 걷는 길로 만들려고 한다.
● 물새떼 반기는 한국판 산티아고
이씨가 강화도 걷기에 빠진 때는 1년 전이다. 주말주택이 있는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뒷산에 올랐다가 바다와 그 너머를 보았다.
바다쪽으로 걸어가보니 바다를 따라 길이 이어졌다. 철책이 막아서 답답했지만 바다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가을이면 청둥오리가 수도 없이 날아왔다.
헐벗은 개풍군은 안쓰러웠다. 생태와 분단이라는 이 시대의 화두가 저절로 떠올랐다. 강화에는 고인돌과 단군성지인 마니산이 있다. 천주교 성지와 불교 명찰도 있다.
그는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한국에는 강화도 순례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온 몸으로 사색하는 이들을 강화도로 초대하고 싶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꼭 이 길을 걷게 하고 싶었다.
그부터 강화도를 걷기 시작했다. 본섬을 일주하니 사흘이 걸렸다. 좋았다. 문제는 차에게는 허용된 길이 뚜벅이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포장된 찻길 너머에는 그보다 훨씬 좋은 흙길이 있는데, 군부대가 통제한다는 점이었다.
군대 덕분에 걷기 좋은 길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군대로 인해 갈 수가 없었다. 자동차는 포장도로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정자 연미정으로 보내줘도 사람은 못 가게 했다.
최근 들어 걷기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방마다 걷는 길을 만들지만 며칠을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다. 차량통행이 뜸하겠거니 싶어 국도를 걸었다간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차량에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
전국에 차도를 만들 때는 걷는 길(인도)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7월26일자 칼럼 '내 마음의 국도')을 편 후 독자 메일을 받았다. "작년에 섬진강을 걸어서 걷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곡성, 구례 지나 하동까지 걷다가 놀라 자빠질 뻔했습니다.
인도도 없는 국도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데 옆으로 지나는 차들이 어찌나 무섭게 달려대는지, 묵상은커녕 내가 왜 시간 들여 돈 들여 이런 위험한 일을 하고 있나 후회만 몰려 오더라구요." 이 독자는 마음껏 걷는 길을 찾아 9월에 산티아고로 떠난다고 전했다.
비록 산티아고처럼 한 달짜리는 못되어도 이들에게 강화도는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비행기표도 필요 없고 겨울이면 물새떼가 비상을 한다.
문제는 철책선으로 구분되는 제한구역이다. 간첩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된 바닷가 철책선에 대해 정부는 단계적으로 없애겠다고 발표하고 동해안에는 일부를 걷어냈다.
국방부에 문의한 결과 강화도는 접경지역이라 걷어낼 계획이 없으며, 이 지역을 걷는 것은 군부대에 미리 신청하면 받아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허락이 전제되면 사색이란 불가능하다.
● 보행 개방되면 통일사색에 도움
강화도에 철책선이 왜 필요한가. 북한에서 난민이 쏟아지는 것을 막는다면 몰라도 간첩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가치를 잃은 지 오래다. 아니 철책을 걷어내서 강화도가 북한 난민이 몰려드는 창구가 되었으면 싶다.
그것은 먼 일이라 해도 철책 안쪽 길을 순례보도로 개방하는 일은 즉시 시작해도 좋다. 길을 걸으면 누구보다 이 땅을 사랑하게 되니 지켜줄 마음도 분명 커진다. 땅은 철책이 아니라 정신이 지킨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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