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 은 TV 연속극으로는 드물게 사이코 드라마의 경지에 다가갔다. 꽃미남 남자 주인공 조인성의 심리 연기가 돋보였지만, 젊은 남녀 두 쌍의 얽히고 설킨 욕망과 애증의 갈등이 중심이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희망과 화려한 욕망의 뒤틀림'을 그리는 것이 드라마 기획 의도였다고 한다. 발리에서>
● 한반도 현실과 욕망의 갈등
현실과 희망과 욕망의 갈등. 호주 시드니에서 부시와 노무현 대통령이 연출한 해프닝도 이렇게 볼 만하다. APEC 정상회의 언저리에서 만난 두 나라 정상의 언론 브리핑에서 벌어진 사건은 미국쪽 통역의 잘못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근본은 북한 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을 둘러싼 두 나라 정부와 정상의 정책기조에 깔린 기본인식과 내면심리가 서로 엇갈리고 뒤틀린 현실일 것이다.
해프닝 현장의 우리 언론이 이틀 만에 겨우 소명한 경위를 살펴보자. 부시 대통령은 "북한지도자가 핵무기 프로그램을 전면 공개하고 폐기하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 안보체제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핵 폐기 대가로 제시한 한국전 종결과 평화조약 체결 등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새 안보체제'로 뭉뚱그린 셈이다. 정상회담에서는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미국측 통역은 이를 "…폐기하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두루뭉수리로 옮겼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대뜸 "평화체제, 종전선언을 빠뜨린 것 같은데 우리 국민이 듣고 싶어하니까 명확히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파격적이고 무례하게 들릴 요구다. 그러나 부시는 내색하지 않은 채 "한국전을 종식시킬 평화조약 서명 여부는 김정일에게 달렸다"고 말했다. 수굿한 응대 같지만 느낌은 다르다. 악동 김정일을 욕하던 인식과 심사를 드러낸 것으로 볼 만하다.
통역은 이걸 또 엉뚱하게 옮겼다. '평화조약 서명' 대신 '평화체제 제안'이라고 말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면서, "김 위원장과 한국 국민은 그 다음 얘기를 듣고 싶어한다"고 재우쳤다. 급기야 부시도 성질이 난 듯, "더 분명히 할 게 없다"며 일어섰다. 한국말을 모를 측근들이 고개를 내젓고, 미국 언론이 '거친 압박' 운운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된 책임은 애초 미국 쪽에 있다. 미국은 기이하게도 국무장관과 대통령에게 평소보다 못한 통역을 붙여 사단(事端)을 만들곤 한다. 자신들에게 미덥고 편한 통역을 찾다 보니, 복잡한 현안을 한국말로 정확히 옮기지 못하는 이가 나서는 게 아닌가 싶다.
부시는 평화 의지를 최대한 내보였는데도 노 대통령이 자꾸 엉뚱한 주문을 하는 것이 짜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성마른 면모와 완고한 북한 인식을 드러낸 것을 변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노 대통령의 잘못에 대해서는 '영어듣기만이라도 됐더라면…"이라고 쓴 네티즌 논평이 언뜻 절묘하다. 그러나 정작 아쉬운 것은 우리 통역이나 측근이 미국쪽 통역 잘못을 대통령에게 귀띔해줄 수 없었을까 하는 것이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은 알지만, 대통령의 '오해'와 파격을 그저 넋 놓고 지켜본 것은 안타깝다. 우리 언론도 엉터리 통역 내용을 그대로 '브리핑 전문'이라고 보도하고, 온갖 해설과 논평 자료로 삼은 잘못이 크다.
● 엇갈린 인식과 심리부터 조절해야
물론 이런 논란보다 중요한 것은 해프닝의 진짜 메시지다. 우리 정부와 사회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 지각변동이 임박했다는 관측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부시는 핵 폐기가 절대적 전제 조건임을 명확히 했다. 객관적 전문가들도 군사 긴장완화 조치 등 여러 단계 평화 합의와 협정(peace agreements)을 거쳐 평화조약(peace treaty)에 이르려면 여러 해가 걸릴 것으로 본다.
우리 사회가 안팎으로 뒤틀린 갈등을 되풀이하는 근본도 이처럼 엇갈리는 현실 인식과 욕망 심리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심리적 균형부터 이뤄야 한다는 얘기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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