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 한 구절이라도 새 나갈라" 극도의 보안중국 대표단 관광객 위장 입국… 적극적 자세에 진전 확신
1992년 6월19일 중화인민공화국의 한중수교 예비회담대표단이 제3차 예비회담을 위해 관광객으로 가장하고 극비리에 한국에 도착하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 7시30분 이상옥 외무장관,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안기부 K차장이 모인 3자회의에서 김 수석은 정상회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어내라는 지시와 함께 수교문안에서도 강경 입장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이 장관은 조기수교에 역점을 두고 가능한 한 수교문안을 무난히 타결하려는 방향에서 지침을 내렸다.
수교문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했다. 조찬 후 김하중 참사관을 내 차에 동승시켜 동빙고동 안가의 대책반으로 가서 ‘수교의정서’와 ‘비망록(양해각서)’안을 신정승 과장과 함께 다시 정리했다. 공개적 성격의 내용은 의정서, 비공개적 성격은 비망록에 재배치하여 초안을 작성했다.
이어 김석우 아주국장, 변종규 외교안보비서관, 안기부 간부 H가 모여 두 문안을 검토한 후 김 국장은 이 장관, 변비서관은 김 수석, 안기부에는 H 간부가 각각 보고하되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즉시 대책반에 연락토록 했다.
오후 3시께 김 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장관은 ‘수교의정서’는 그대로 좋고 ‘비망록’중에서 한국전 참전과 북한핵문제 부분을 상당히 완화해서 교섭을 쉽게 풀어나가라는 요지였다.
청와대와 안기부로부터는 별다른 수정 요청이 없었다. 대책반은 수교에 관한 우리측 문안을 최종 확정지었다. 아울러 문안교섭의 전권은 내게 위임된 것이었다.
회담장소인 워커힐 VIP빌라는 나의 서툰 눈에도 ‘명당’이라는 느낌이 확 전해졌다. 뭔가 일이 성사될 것 같은 상서로운 예감이 들었다. 오후 5시 우리는 안기부에서 마련한 검정색 그랜저 한대와 기아 미니버스에 나누어 타고 김포공항으로 출발했다.
저녁 7시 반경 공항 귀빈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캐주얼 차림의 장루이지에(張瑞杰)대사를 앞세워 중국대표단 7명이 나타났다. 내차에 장 대사를, 나머지 대표단은 미니버스에 나누어 태워서 올림픽대로를 따라 워커힐 VIP 빌라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 8시30분께 2층 장 대사의 거실로 가자 장 대사가 처음 입을 연 것이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정상회담 환영이었다. 김종휘 수석이 깊은 관심을 갖고 요구했던 정상회담의 기본적 사항은 일단 해소된 셈이다. 중국측이 정상회담에 대한 답을 가져 온 이상 우리측의 입장도 유연해졌다.
둘째는 중국이 문안을 가져와 우리에 사전 검토하도록 건네주었다. 4개항으로 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사이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데 관한 공동컴뮤니케(초안)’와 5개항으로 된 ‘양국수교에 관한 양해비망록(초안)’의 중국어본과 한글본이었다.
중국이 수교문서의 문안을 가져온 것은 중요한 진전이었다. 더욱이 우리가 사전 검토하도록 문안을 건네준 것은 수교에 적극적인 자세라는 의미였다.
한국대표단은 숙소로 별개 건물인 맥스웰하우스(Maxwell House) 2층 전부를 사용했고 안기부가 은밀하고 완벽하게 보안유지 임무를 수행했다. 내방을 2315호로 정하고 그 옆방인 2317호 온돌방을 대표단 작업실 겸 신정승 과장 방으로 정했다. 나는 곧 대표단 전원과 김석우 아주국장, 그리고 안기부의 S 과장을 2317호에 소집 한 후 비상근무 체제로 들어갔다.
우선 중국측 문안을 철저히 검토했다. 한국과 대만의 관계, 그리고 한국 내 대만대사관 재산 외에는 문제될 만한 내용이 없었다. 우리 대표단은 양측 문안을 통합, 하나의 공동문안을 작성했다. 20일 시작될 동해사업 제3차 예비회담의 기초안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중국측이 수교문안 합의에 적극적일 때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이번 예비회담 기간에 수교문서를 타결 짓자는 전략이었다. 무엇보다 보안이 염려되었다. 중국대표단의 입국과 워커힐의 수교회담 및 숙식 등은 이미 외부에 노출된 셈이었다. 실오라기 같은 단서라도 언론에 포착될 경우 그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내가 가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문안합의에 이르기 전에 비밀이 노출되어 언론에 보도되거나 대만 또는 북한에 알려져 대만이 한국에 대하여, 그리고 북한이 중국에 대하여 반발, 강력한 로비를 펼칠 경우였다.
비밀수교교섭은 중단 내지 무기 연기되고 나를 포함한 대표단은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머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기 전에 3차회담에서 문안 합의라도 해 놓으면 대비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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