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애(여ㆍ가명)씨는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며 만난 내연남이 결별을 통보하자, 집으로 찾아가 잠자고 있던 그의 아내를 부엌칼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검찰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휴대폰 통화내역 자료 외에는 살인과 관련한 직접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한씨도 살인사건이 일어난 그 시간 어머니 집에 있었다며 완강하게 무죄를 주장한다.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어떤 평결을 내릴까.
10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에서 열린 국민참여(배심제) 모의재판에서는 외국영화의 한 장면처럼 검사와 변호사들이 배심원단을 설득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피고인과 증인 역할만 전문 연기자들이 맡았을 뿐 현직 판ㆍ검사와 변호사들이 재판을 진행했다.
배심원단은 법률에 정해진대로 이 법원 관할지역 주민들로 구성됐다. 재판의 대본은 현실감을 더하기 위해 2004년 일어난 실제 살인사건을 토대로 각색했지만, 배심원들에게 불필요한 선입견이 생기지 않도록 그 같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검찰과 변호인은 오전10시 시작된 9명의 배심원과 3명의 예비배심원 선발 단계에서부터 기 싸움을 벌였다. 검사는 추첨을 통해 선발된 배심원 후보 중 검찰수사나 형사재판을 받은 경험이 있는 이들을 “과거경험이 공정한 판단을 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잇따라 배심원에서 제외해 달라는 기피신청을 했다.
변호사도 “가정주부가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부남이 술집 접대부와 바람이 났다면 누구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 등을 통해 자신의 의뢰인에게 불리한 평결을 할 가능성이 있는 후보를 솎아내려 애썼다.
양측은 재판과정에서도 배심원단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마음을 끌어당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검사는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피 묻은 물품을 들어보이는가 하면, 피고인의 통화내역 조회자료를 슬라이드로 제작, 심문에 이용했다.
변호사도 검사가 증인으로부터 의뢰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유도할 때는 재판장에게 즉각 이의를 제기해 맥을 끊었고, 배심원단에게도 끊임없이 “다소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고 해도 유죄에 대한 확증이 없다면, 피고에게 무죄가 선고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4시간에 걸친 재판이 끝난 후 배심원들 사이에 평의가 이뤄졌다. 피고인이 내연남도 아닌 그의 아내를 죽이기에는 살해동기가 약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검찰이 제시한 다양한 간접증거만으로도 충분히 유죄라는 주장도 나왔다. 배심원단의 평의 결과를 받아 든 재판부가 고심 끝에 오후6시께 선고를 하면서 장장 8시간 동안 이어진 이날의 모의재판은 막을 내렸다.
배심원으로 참가한 시민들은 새로운 경험에 대체로 만족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회사원 조영옥(57ㆍ여)씨는 “검사, 변호사들이 증거자료를 제시하면서 다투는 내용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어려웠다”며 “법정에서 사건 내용을 좀 더 치밀하고 생동감 있게 설명해주면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전성철기자 for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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