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고교 교장 중 최고령에 최장기간 재임하고 있는 엄규백(76) 서울 양정고 교장이 5일 퇴임했다. 1973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이 학교 교장에 취임한 그는 35년간 양정고 교장직을 떠나지 않았다. 교육계 주변에서는 그의 퇴임을 ‘아름다운 퇴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교사(校舍) 이전과 개교 100주년 행사를 끝낸 뒤 후배에게 교장직을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엄 교장의 ‘전직’은 서울대 교수였다. 14년간 서울대 식물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범한 대학 교수였던 그에게 73년 6월 어느날 아버지(고 엄경섭 전 국회의원)가 느닷없이 “양정고 교장을 맡으라”고 권유했다. “교장은 자신 없다”는 이유로 6개월을 버텼으나, 적임자가 나타나지 않자 같은 해 12월 할아버지가 세운 학교의 교장을 맡게 됐다. 엄 교장은 “당시 부친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학교를 돌볼 여유가 없어 가업을 잇자는 생각에서 수락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교장 취임 후 그의 활동상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는 “후회없이 보낸 35년”이라고 표현했다. 74년 고교평준화 조치 이후 명문대 입학률이 계속 떨어지자 좀 더 환경이 나은 곳으로 교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교사 이전 계획을 세운 이후 10년이 지난 98년 3월 결실을 맺었다. 양정고 목동 시대를 새로 연 것이다. 양정고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에 매년 30명 이상씩 진학하고 있다. 진학 실적만 놓고 보면 강남권 학교에 전혀 뒤지지 않는 사학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인재 양성을 향한 그의 욕심은 다른 곳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엄 교장은 2006년 11월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격인 SAT를 치르지 않고도 학교장 추천만 있으면 미 뉴욕주립대 제네시오캠퍼스 입학이 가능한 협약을 체결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우수 학생은 대학때부터 해외유학을 보내야 한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결과다. 올해 양정고생 3명이 3,000달러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 대학으로 직행했다.
엄 교장은 “재임 기간 중 졸업한 2만명 중 92년 졸업한 이학호 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학원 과외 한 번 받지 않고도 최고 실력을 발휘한 학생이라는 이유에서다. 수능시험 최고점을 획득한 이 군은 서울대에 수석합격한 뒤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현재 하버드대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고 있다.
엄 교장은 2005년 5월 개교 100주년 행사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후임 교장 물색에 나서 김창동(52) 전 서울시교육청 중등장학사를 최종 ‘낙점’했다. 모교 출신인 김 신임 교장은 이날 양정고 교정에서 열린 교장 이ㆍ취임식에서 “엄 선생님이 닦아놓은 훌륭한 교육의 전통을 소중히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김진각 기자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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