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가)이익은 재부(財富)의 원천을 토지에 두었으므로 토지에서 힘써 일하는 데에서 재부가 창출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정치에 있어서도 전제(田制)에 관한 올바른 시책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생각하였다. 토지는 원천적으로 공전(公田), 즉 국유이며, 토지 사유의 확대는 사회악의 원천으로 여겼다.
관료에게 작위와 전지·녹봉을 주는 것은 그들 자신의 관작을 귀히 여겨서 생계를 부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실제로 관작에는 부가 겸해 따르므로 관작에 대한 욕구가 더욱 치열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세가에 의한 대토지점유와 재부의 독점은 인간의 덕성마저 해치게 하여 사회악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그의 경제사상의 근저에는 무농(務農)·절검(節儉)·모리작간(謀利作奸)의 방지라는 세 가지 조건이 깔려 있었다.
전화(錢貨, 화폐)는 기본적으로 재화의 유통 및 매개를 위해 필요하지만, 당시 실정에 비추어 화폐의 유통이 농촌경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사리(射利)와 사치의 풍조를 조장하고 악화(惡貨)의 유통, 고리대 행위의 폐단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전제를 개혁하는 한편, 승려·창우(倡優)·궁비(宮婢)·액속(掖屬) 등 유식자(遊食者, 놀고먹는 자)와 용관(冗官, 쓸모없는 관리)을 없애 재정을 긴축시켜서 과다 징수를 없애며, 관개·수리사업을 일으키고 경지개발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토지제도는 측량을 철저히 하여 호세가(豪勢家, 세력가)에 의해 토지를 광범위하게 소유하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이른바 한전법(限田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즉 나라에서 일가(一家)의 기본수요전적을 1결(結)로 작정해 이것을 한 가호(家戶)의 영업전(永業田)으로 삼고, 그 이상의 전지를 차지한 자에게는 자유매매를 허용하되, 그 이하의 점유지에 대해서는 매매를 엄금하며, 일체의 전지매매는 관청에 보고해 관에서 전안(田案)을 비치하고 문권을 발급해 법적 보증이 되게끔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한다면 현재의 점유전지에 대한 감탈(減奪)이나 가수(加授)를 하지 않더라도 전지점유는 균등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전지를 많이 차지한 자는 그들의 자손에 의해 분점(分占)되거나 혹은 불초한 자의 파락(破落)으로 말미암아 여러 세대가 지나면서 전지가 줄어 평민과 균등하게 된다.
반면 빈농의 전지매각을 금하면 호세가의 토지겸병이 불가능하고, 빈민은 지력(智力)을 다해 절검(節儉)·증식(增殖)에 노력한다면 조금씩이라도 전지를 사서 제한량까지는 늘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일세법(什一稅法)의 원칙을 엄수해 족징(族徵)·인징(隣徵)·백골징포(白骨徵布)·수포방번(收布放番) 등 종래에 자행되어 온 봉건적인 과징(過徵)·남징의 폐단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또 사치의 풍조를 없애기 위해서는 억말(抑末), 즉 상행위의 억제책을 주장하였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사치품수입은 국내 산출의 은화(銀貨)뿐만 아니라 미포(米布)로 바꾸어 유입되는 일본의 은정(銀錠)까지도 중국으로 유출되며, 그것은 또 국경에서 상역배(商譯輩)에 의한 밀무역을 유발한다고도 하였다.
특히, 빈민구제라는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공사간의 고리대행위로 변질된 조적(夕蛇)은 전제·세제의 개편과 아울러 원래의 진휼책(賑恤策)으로 환원, 실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익의 학문사상은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단적으로 말한다면 탈주자학적인 수사학적 수기치인의 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학에로의 복귀 내지 부흥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사회현실에 입각한 사회개편을 주장한 개혁사상을 의미한다.
그의 학문의 체(體)는 어디까지나 경학에 두어졌음에도 사회현실에 비추어 보다 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학의 수용으로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켜갔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체득할 수가 있었다.
그의 여러 ‘이단 (異端)’에 대한 자세를 볼 때 윤리면에는 너그러웠지만, 신앙 자체는 거부적인 견해를 취하였다. 그 점에서는 새로 전래, 유포되던 천주교에 대해서도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유학자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그는 이교배척, 폐전론(廢錢論)·상업 억제책의 제의, 남녀관 등에서 정통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사민평등의 인간관·신분관·직업관에서 근대적인 사회로 한 걸음 다가섰음을 엿볼 수 있다.
(나)돈이란 그 몸은 하나이나 그 뜻은 네 가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전(錢)의 바탕은 둥글고 모납니다. 둥근 것은 하늘을 본 땄?모난 것은 땅을 본 딴 것이니 이른바 덮고 실으며 돌고 돌아서 끊어짐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천(泉)이니 그것은 통행하고 흘러 다니는 것이 다함이 없는 샘물과 같다는 것이며, 셋째는 포(布)이니 그것은 백성들 사이에 퍼지되 상하에 두루 퍼져 영원히 막히지 않는 것이며, 넷째는 도(刀)이니 그것은 좋고 날카롭게 놀리면 빈부를 나누며 날마다 써도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개 쌀을 화폐로 만들면 멀고 가까운 곳의 무역할 때에 운반하기가 가장 어려워 실제의 쓰임은 수량(銖兩)만큼 되고 헛되이 버리는 것은 천구(千鉤)만큼 많을 것입니다. 즉 수 백리 밖의 쌀을 운반할 때에 말 한 마리에 불과 두 섬을 실어 열흘이 걸릴 것이니 사람이나 말의 힘이 이미 절반이 소모될 것입니다.
혹은 저축한 것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한겨울이나 한여름에 직접 등에 지고 가다가 더위와 추위에 부딪쳐 길에 쓰러지는 등 그 곤란이 말할 수 없지만, 지금 돈을 쓰면 사람이 지거나 말에 싣는 괴로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그 첫째 이익입니다. 국가 창고에는 주옥(珠玉)이나 구패(龜貝)등의 보물과 금·은이나 서상(犀象)의 보물은 제하고 그 이외는 쌀과 포목만 저축하면 포목을 오래두면 상하는 손해가 있고 쌀은 오래 두면 썩는 손실이 있으며, 게다가 좀이 먹고 습기가 차며 비가 새고 화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만일 돈을 쓴다면 저장하기에 견고할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에도 매우 편리한 것이니, 이것이 그 넷째 이익입니다. 신(臣)은 전하의 성취할 수 있는 자질을 만났삽고 또 성취할 수 있는 시기를 만났습니다.
전천(錢泉)과 포도(布刀)는 실로 널리 구제할 기구가 될 것이니 중니(仲尼)가 말한바 "백성의 이로움을 이로움으로 안다"는 그것입니다......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지극한 지혜로 결정지어 과감히 실행하십시오. 그것은 국가의 복이 될 것이며 대대로 백성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대각국사문집 12)
(다) 물건을 서로 교환해 쓰던 옛날에는 소 한 마리와 비단 100필을 바꾸려면 사람들은 그것들을 직접 가지고 서로 만나야 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불편한 점이 많아 공통적으로 값을 인정해 줄 수 있는 물건 이 돈처럼 사용된 것.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물품화폐다. 유럽에서 담비가 많이 서식했던 크로아티아에서는 담비모피를 돈으로 사용해 이를 통해 물건을 사고팔고 세금도 냈다. 오늘날 크로아티아 화폐 단위는 쿠나(kuna)인데 이는 크로아티아 언어로 담비를 뜻하는 용어다.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양파를 말려 화폐로 사용했다. 양파를 갈아 반죽을 만들 고 이를 공 모양으로 바꾼 후 태양열로 건조하면 썩지 않고 운반이 편하며 사람 들이 널리 인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니카라과 원주민들은 코코아열매를 화폐로 사용해 토끼 한 마리 값이 코코아열매 10개에 해당됐다.
실크로드 중심에 있었던 타지키스탄에서는 실크, 슬로바키아에서는 도끼, 오만에서는 총탄이 물품화폐로 사용됐다. 이런 물건은 모두 그 나라에서는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에는 토기와 볍씨, 삼한시대에는 손도끼, 철제 화살 촉 등이 화폐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삼국시대의 미곡과 직물, 고려 시대 은병 등도 화폐 역할을 했다.
(라)인플레이션의 발생 원인으로는 통화량의 증가, 가계의 소득증대, 원자재 및 임금 상승 그리고 물가상승 기대심리 등이 있는데 이중 대표적인 것이 통화량 증가에 의한 인플레이션이다. 정부가 국가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조세저항 없이 손쉽게 조달하기 위해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돈을 새로 찍어내도록 하면 물가수준이 상승하고 우리의 지갑 속에 있는 돈의 가치는 이전보다 떨어지게 된다.
정부의 화폐발행 증가는 납부고지서만 발행하지 않았을 뿐이지 인플레이션을 통해 불특정한 모든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효과와 같다고 해 이를 인플레이션 조세라고도 한다. 그러면 인플레이션이 우리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알아보자. 우선 고정소득생활자들의 살림이 어려워진다.
봉급이나 연금 인상이 물가상승보다 낮을 때에는 소득이 실제로 줄어든 것과 같은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금 등 고정소득으로 생활하는 노년층일수록 인플레이션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물가가 오르면 돈을 빌려준 채권자는 손해를 보게 되지만 돈을 빌린 채무자에게는 이익이다. 물가가 많이 올라 돈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더라도 채무자는 돈을 빌릴 당시의 원금과 일정이자만 돌려주면 되기 때문이다.
국민경제 전체로 볼 때 대체로 가계는 은행예금 등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는 채권자인 반면 기업과 정부는 대출 및 차입 등으로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로 분류된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은 가계의 부를 기업과 정부로 재분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물가가 계속 올라 돈의 가치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면 저축을 하기보다는 琯옐?등 실물자산을 구입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산 가격이 상승해 실물자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재산은 불어나지만 집 없는 서민이나 봉급생활자들의 생활은 더욱 빈곤해지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이와 같이 인플레이션은 경제적 약자에게는 손해를, 경제적 강자에게는 이익을 주는 측면이 있다.
나라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때로는 치명적인 병이 되기도 하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노력하고 있으나 어느 나라도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나라는 없는 듯하다. 지난 수년간 비교적 안정된 물가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최근 경기회복과 더불어 고유가 지속, 부동산가격의 오름세 등으로 물가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과도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모든 경제주체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특히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일보)
논제 1. 제시 문 (나)와 (다)를 참고하여 제시 문(가)의 주장을 비판하시오.
논제 2. 제시 문 (라)를 이용하여 제시 문(가)의 입장을 옹호하시오.
논제 3. 제시 문을 참고하여 화폐의 유용성과 문제점이 개인 및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논술하시오.
논제 4. 화폐의 발달은 경제성장과 관계있음을 언급하고 이자가 높은 사채나 은행
[문제풀이]
최초의 화폐가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일반적으로 조개라고 대답을 한다. 만약 조개가 돈이었다면 조개무지는 은행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지난주에 살펴본바와 같이 조개무지는 그냥 생활 쓰레기장이었을 뿐이다. 과연 조개가 화폐의 역할을 한 적이 없는가? 기원전 16세기경 중국에서 조개껍질이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널리 쓰이게 되어 중요한 화폐의 기능을 하였다.
이 패화는 열대지방의 해안에서 서식하는 자안패(子安貝)로서, 중국 근해에서는 많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물품화폐로서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한자에서도 재산과 관련되는 한자에서 조개 패(貝)가 많이 쓰이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 패화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화폐의 발달은 가장 먼저 물품화폐에서 시작되어 점차 칭량화폐, 주조화폐, 지폐, 신용화폐의 순으로 발달되어 왔다. 물품화폐란 물건 그 자체가 화폐의 역할을 한 것인데 이는 흔히 자급자족 경제에서 물물교환에 의한 경제현상에서 나타난다. 모든 물건이 화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나누는데 불편함이 없고, 보관이 간편하고, 운송이 쉬워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희소한 가치를 인정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지녀야 화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재화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품을 주변에서 보면 곡식이나 쌀 혹은 포(옷감)같은 것을 물품화폐의 일반적인 물건들이라 할 수 있다. 칭량화폐는 무게로 가치를 표시한 화폐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기는 한다. 그 예로 금괴나 은괴 같은 것이 있으며 칭량화폐가 한반도에 등장 한 것은 1101년에 일종의 귀금속 칭량화폐로 활구(闊口)라고 하는 은병(銀甁)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다음이 주조화폐이며 이때부터 일반적인 화폐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지폐가 통용되었으며 오늘날은 신용사회를 기반으로 하 는 신용화폐와 전자식 자금이체제도 같은 거래방법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의 화폐발달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물물교환이 지배적이었고, 옷감이나 곡물 혹은 무기·생산기구·장신구·가축· 등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중국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 · 포전(布錢) · 오수전(五銖錢) · 개원전(開元錢) 등이 중국으로 부터 유입되어 사용되었던 흔적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1097년(숙종 2)에 동전인 해동통보를 만들어 사용했고, 그 이후 동국통보 · 동국중보 · 삼한통보 · 삼한중보 · 해동중보 등이 주조 · 유통되었다. 또한 1101년 은병이 주조 · 유통된 이후 소은병 · 쇄은 등 칭량은화가 통용되고, 고려시대에는 송 · 원 · 명 등 중국의 각종 화폐가 유입되어 국내의 일부 유통 계와 대외무역의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사회 경제적 기반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폐는 활발히 유통되지 못하였고, 그 대신 쌀 · 포 등 물품화폐와 칭량화폐가 널리 유통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08년(태종 8)에 칭량은화의 통용을 금지시켰고, 이어 1410년부터 저화를 법화로 만들어 쓰기 시작했으며 1423년(세종 5)에는 저화제의 문제점 보완하기 위해 조선통보라는 동전을 주조해서 유통시키게 되었다.
국가화폐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1464년(세조 10)에는 포 · 쌀 등 물품화폐와 저화 · 동전 등 명목화폐를 절충·보완한 전폐를 철로 만들어서 비상시에는 화살촉으로, 평상시에는 화폐로 사용하려고 주조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화폐가 유통될 정도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폐원료의 공급이 어려웠으며 화폐정책 또한 합리적이지 못하여 저화나 동전 등은 계속 유통되지 못하고 포 · 쌀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가 유통되었다.
조선 후기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임진란으로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의 부흥 일환으로 화폐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633년(인조 4년)조선통보, 1646년 십전통보(十錢通寶) 등을 주조하여 법화로 유통 · 보급시켰다. 1678년(숙종 4)이후 사회경제적인 기반이 형성되면서 상평통보가 주조되기 시작하였으며 화폐의 유통범위가 점차 확대되자 화폐에 대한 인식도 변하였다.
1894년에는 갑오개혁의 추진과 더불어 신식화폐발행장정을 공포하여 상평통보의 발행을 중단하였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근대 은본위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1909년에 한국은행이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화폐는 한국은행에서 발행하게 되었다.
김현석 통합논술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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