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문 이야기가 있다. 공자님 말씀이 담긴 <논어> 가 그렇고, 셰익스피어의 고전들이 그렇고,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렇다. 제우스와 아킬레우스,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들이 엮어가는 태초의 이야기들은 유년의 기억 저편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논어>
2000년, 그런 망각의 강을 건너는 다리 하나가 놓였다. 웅진닷컴에서 나온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가 그것이다. 이 책은 화석이 돼 가던 먼 유럽 문명의 원형질을, 단숨에 대중적 관심의 대상으로 되살려 냈다. 인문서로는 기록적으로 174쇄까지 찍은 1권을 비롯, 2년 터울로 나온 2권과 3권이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신화’를 21세기의 확실한 문화 코드로 복권시켰다. 이윤기의>
이 책이 폭발적인 대중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서술 방식의 독창성이다. 저자는 신화의 계통학적 기술에 관심이 없다. 구수한 문체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상징과 비유의 세계를 토막내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여기에 이런 얘기가 있고, 저기도 이런 전설이 있고…’ 하는 식으로 은근슬쩍 그 속에 감춰진 열쇠를 만지게 해 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독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스스로 탐험케 하는 가이드북이다.
하지만 이런 이윤기 식 신화 쓰기는 적잖은 논란도 불러 일으켰다. 대중적 인기 못지않게 학계와 평단의 비판도 잇따랐다. 저자가 정한 테마에 맞춰 원래 신화의 내용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그 해석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쓴’ 것”이라며 “잡초 없는 뜰은 없다. 뜰 가꾸는 자에게 잡초는 숙명”이라고 해명하곤 했다. 이렇게 논란이 이는 일 자체가 수천년을 내려오면서도 빛이 바래지 않고 오히려 풍성해지는 신화의 힘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1권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는 서양문명의 토질에 익숙하지 않아 우리가 종종 소화불량을 일으켰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국적 정서의 프리즘에 투과시킨 첫번째 작품이다.
저자는 서문에 새천년의 벽두에 신화를 얘기하는 감회를 이렇게 썼다. “신화는 미궁이다. 미궁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는 않는다. 신화 역시 그 의미를 읽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신화는 미궁과 같다.”
그러면서 그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쥐어 준다. “모쪼록 독자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실타래로써 미궁 탈출을 시도해 보기 바란다. 독자는 지금 신화라는 이름의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라. 일단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기 바란다. 필자가 뒤에서 짐받이를 잡고 따라가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전거 타기’를 배웠고, 이 책은 든든한 멘토가 돼 줬다.
2권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는 보다 심화된 주제로 나아간다. 사랑을 테마로 인간이란 존재의 심연과 관련된 근원적 의문에 다가선다.
도덕 관념이 형성되기 전, 어떤 윤리적 잣대로도 재단되지 않은 채 애욕으로 뒤엉켜 있는 그리스 신들의 모습을 통해 ‘성(性)과 사랑’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들여다본다. 역사와 철학의 경계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적나라한 성에 숨겨진 신화의 비밀을 탐색한다.
3권은 신들의 턱밑까지 다가선다.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라는 부제가 붙은 3권은 호모 테오필로스(신들이 좋아하는 인간)와 호모 테오미세토스(신들이 싫어하는 인간)을 구분한다.
그것을 통해 저자가 제시하는 열쇠는 결국, 신화에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꿈과 진실이 담겨 있다는 단순한 명제다. 동생을 살해한 뒤 방황하지만 유혹에 저항하며 죄를 갚으려고 노력하는 펠레우스를 신들이 사랑한다는 이야기엔, 신들의 세계가 아닌 인간사의 진리가 스며 있다.
저자가 동네 서낭당 전설 얘기하듯, 그리스 로마 신화를 술술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 그 구성진 이야기보따리의 바탕에는, 사실 피 말리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가 외국의 미술관과 박물관,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구입한 도록만 수천 권이 넘는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연구원으로 있을 때 사들인 신화 관련 책값만 해도 집 한 채 값이다. 각 권에 실린 각 200장 남짓한 사진들은 그가 직접 찍은 수만 장의 사진 중에서 고르고 또 고른 것들이다.
그리스의 마른 대지를 떠돌던 이윤기의 붓끝은 요즘 우리 신화의 풍경을 터치하고 있다. 얼마 전 발간한 에세이집 <꽃아 꽃아 문열어라> 가 그것. 꽃아>
하지만 서양 신화 속에 숨겨진 열쇠를 찾는 그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모두 10권으로 완성된다. 대리석 조각 속에 잠들어 있는 어떤 신이 다시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올지, 이윤기의 다음 책이 궁금하다.
■ 21세기의 신화열풍 왜?
비현실적 판타지·로맨스, 대중의 反이성 성향에 부합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물론 한국 신화의 수수께끼, 북유럽 신화를 다룬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드라마로 만들어진 '주몽'과 '태왕사신기'가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신화가 넘쳐나는 시대다. 정보문명의 디지털 데이터가 포화상태에 이른 21세기, 사람들이 다시 신화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에서는 1970년대 이후 신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경험주의 인식론, 극단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과학문명에 대한 맹신은 대량 학살과 환경 파괴라는 보복으로 돌아왔고, 사람들 사이에는 이성적 상태 이전의 인간에 대한 동경이 일었다. 그렇게 2,0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신화가 깨어났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신화 열풍을 그런 맥락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산업문명의 부조리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으로 보기엔, 지금 부는 신화의 바람은 너무 가볍고 얕다. 그보다는 대중문화를 생산ㆍ소비하는 메커니즘이 신화라는 콘텐츠와 결합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신화가 가진 판타지, 원초적 로맨스라는 콘텐츠가 보다 즉물적인 감성을 요구하는 대중의 욕구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는 재미와 흡입력이 큰 그리스 신화가 한국이나 동양의 신화보다 큰 파급력을 갖는 데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극적 스토리와 갈등구조를 지닌 그리스 신화는 신에 대한 찬가로 이뤄진 인도 신화나 제왕의 위업 중심의 중국 신화, 단편적 건국신화가 주를 이루는 한국의 신화보다 훨씬 인기를 끈다.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도 주로 서구의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이성적 사고작용의 수고를 거부하는 대중의 행태도 신화 열풍의 한 진원이다. 요즘 영화나 방송 드라마 대중소설에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은 곧 흥행참패를 뜻한다. 판타지와 엽기성, 비현실적 로망이 적절히 뒤섞인 신화라는 소재는 이런 토양에서 훌륭한 제재가 된다. 근대성의 탈피가 아닌 단순히 비현실로의 탈출구로 신화가 소비되는 바람은, 그래서 그 풍향을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 이윤기 연보
▲947년 경북 군위 출생
▲성결대 중퇴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등단
▲1991~9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종교학ㆍ인류학 연구원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한국번역가상 등 수상
▲소설집 <하얀 헬리콥터> <나비넥타이> , 장편소설 <하늘의 문> <나무가 기도하는 집> ,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 , 번역서 <장미의 이름> <변신 이야기> <인간과 상징> 등 인간과> 변신> 장미의> 무지개와> 나무가> 하늘의> 나비넥타이> 하얀>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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