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전시실 시 한 편 수련과 물, 빛의 육감채호기 / 문학과지성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모네 전을 다시 보러 갔다. 천경자 상설전시실에서 노랗게 책장이 바랜 그의 수필집과 기행문집이 여러 권 전시돼 있는 것을 보고는, 하는 일이 일인지라 ‘오늘의 책’을 생각하며 모네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시인 채호기(50)의 시가 벽면에 커다란 활자로 적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옷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채호기의 시집 <수련(睡蓮)> (2002)의 맨 처음에 실린 시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의 일부다. <수련> 은 모네의 수련 그림 연작처럼, 수련과 연못의 물, 빛, 공기를 소재로 한 시 64편을 모은 시집이다. 수련> 수련(睡蓮)>
채호기는 모네 전을 앞두고 한국일보에 쓴 글에서 “수련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전국 각지의 연못을 순례하던 여름날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느 여름날 새벽, 잠자고 있는, 곧 깨어나 꽃잎을 펼칠 수련이 궁금하여 나는 두근대는 심장의 힘으로 공원으로 달려나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모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모네와 채호기가 만난 셈인데, 다르다면 <수련> 은 채호기가 집요하게 탐구해온 몸과 정신, 감각과 의식의 접점이라는 주제를 특유의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에로티시즘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련>
시인의 이런 탐구는 그 자체 글 쓰는 순간의 관능이기도 할 것이다. 글쓰기와 수면에 피어나는 수련을 대비한 그의 시 한 편. ‘백지의 자궁으로 잉크가 흘러 들고/ 수련을 잉태하고 있는 흰 백지에/ 분만을 준비하는 글자들의 구멍// 너의 시선이 닿는 순간 수련은 피어난다/ 잔잔한 백지의 수면 위로/ 네 의식의 고요한 수면 위로’(‘백지의 수면 위로’에서).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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