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전 총리는 ‘눌변의 정치가’로 유명했다. 와세다(早稻田)대 웅변부 출신이라는 경력과는 딴판으로 수시로 말을 더듬거렸고, 논지가 분명하지 않은 말로 기자들을 괴롭혔다.
이런 어눌함과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하는 태도 때문에 구미 언론으로부터 ‘식은 피자’라는 혹평도 들었지만, 일본에서는 ‘사람 좋은 오부치’라는 따뜻한 평가를 누렸다. 2000년 뇌경색으로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꽤 오래 총리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 궤변보다는 눌변이 낫다
이어 등장한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도 와세다대 웅변부 출신이었다. 그의 문제는 눌변보다는 실언이었다. 그의 말은 허점 투성이였고,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엉뚱한 발언이 결국 조기 퇴진의 실마리가 됐다.
지도자의 눌변과 실언이 두드러진 그때, 다나카 아키히코(田中明彦) 도쿄대 교수가 들고나와 눈길을 끈 말이 ‘언력(言力)의 정치’였다. 그가 강조한 ‘언력’, 즉 말의 힘은 남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상식과 통설이 될 수 있는 말을 골라 쓸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은 특히 정치ㆍ외교 무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정치인의 말에 대한 이런 관심은 리쓰메이칸(立命館)대 히가시 데루지(東照二) 교수의 <언어학자가 정치가를 발가벗긴다> 에서는 아예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이댈 정도에 이르렀다. 일본 역대 총리의 연설과 기자회견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 정치인의 이미지가 얼마나 말의 힘에 좌우되는가를 보여준다. 언어학자가>
말이 중요한 것은 비단 정치뿐이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유명한 요한복음 구절은 신앙심이 없는 사람의 귀까지도 솔깃하게 한다.
‘말씀’이 ‘이성(理性)’이나 ‘근본원리’로도 옮겨지는 ‘로고스(Logos)’의 번역어임을 생각하면, 말에 기대어 사고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말이야말로 세상의 기초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또한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가르치듯, 일상생활과 인간관계에서 겪는 희로애락의 대부분이 말에서 비롯한다.
다만 일반인과 달리 지도자의 말이 유독 관심을 끄는 것은 우선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역할기대가 크고, 말이라고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대중의 관심을 대변하는 언론의 체질 상 지도자의 말은 다른 어떤 사람의 말보다 강력한 전파력을 갖는다. 그런 높은 관심에 부응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의 말은 어떤 것일까.
말은 사람 됨됨이와 속 알갱이를 그대로 보여 주기에, 지도자의 말은 곧 그의 자질을 드러낸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 에서 정치가의 3대 자질로 정열과 책임감, 통찰력을 들었다. 직업으로서의>
베버가 언급한 ‘정열’이 개인적 욕구나 자아도취와 거리가 멀다는 점을 잠시 접어두고 일반적 의미로 새기면, 말로써 그토록 말 많은 노무현 대통령도 정열만큼은 남 못지 않다. 문제는 자기확신이나 과대망상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힘인 ‘통찰력’, 동기뿐만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려는 ‘책임감’이다.
■ 통찰과 책임감이 담겨야
‘정윤재 의혹’이나 ‘변양균 의혹’이 “깜도 안 되고”, 자신은 개혁적 동기에서 잘 했는데 결과가 나쁜 듯한 인상을 준 것은 “조지는” 언론 때문이라는 말에서는 통찰력과 책임감은 눈곱만큼도 보기 어렵다. 너무 자주 대통령의 말에 시달려온 탓에 이제는 안쓰러움이 앞선다. 계절은 가을이고, 그가 청와대를 떠날 날도 멀지 않다.
정작 걱정은 따로 있다. 대선주자 가운데 다변과 달변, 열변을 자랑하는 사람은 있어도, 진정한 말의 힘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짧고, 알차고, 감동적인 승복 연설로 잠시 말의 힘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 대선주자들이 하루빨리 말의 힘에 눈 떠서, 남을 욕하기 전에 자신의 포부와 비전을 진솔하고 아름답게 펼쳐 보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침묵이 낫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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