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 안의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할까. 근대 이후 인류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확인한 방법이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다. 소비자나 시장 참여자가 원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투표'를 함으로써 자원 배분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수요가 많은 상품이나 서비스는 가격이 올라가고, 기업은 이윤을 늘리려고 그 쪽으로 생산을 돌린다. 거꾸로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상품이나 서비스는 수요가 낮아지고, 투입되는 자원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가격이 내려간다. 제대로 작동되기만 하면 이보다 나은 조절 장치가 없다.
■물론 시장이 언제나 합리적일 수는 없다. 기본 전제인 완전한 자유경쟁은 이론 상으로나 가능할 뿐이다. 시장 참여자의 힘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고, 그 차이에서 '시장의 실패'가 나타난다.
이런 실패를 줄이겠다고 정치가 나섰고, 그 극단적 형태가 사회주의였다. 정치조직이 사회적 수요를 정확히 파악할 수만 있었다면 시장보다도 유능하고, 정의롭게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인간 욕망에서 비롯한 수요 변화를 충분히 예측할 정치조직이란 애초에 없었다. 결국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그나마 실패 확률이 낮은 시장으로 되돌아왔다.
■정치적 민주주의도 다르지 않다. 일찍이 플라톤이 지적했듯, 민주주의는 분명 최상의 정치체제는 아니다. 지루하고 시끄러운 토론을 거쳐야 하는 데다, 선거라는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드는 절차도 그리 신통하지 않다. 작은 지혜가 모여 큰 지혜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어리석음을 긁어 모은 듯한 선거 결과도 있다.
흔히 국회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온갖 부정ㆍ비리의 온상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국회를 유지하고, 민주주의에 기대는 것은 그런 것이 아예 없을 때보다는 결과적으로 비용이 적게 든다는 판단 때문이다.
■시장이 수요에 의해 움직이듯, 민주주의는 여론에 의해 움직인다. 정치권력은 시장 수요뿐만 아니라 여론 파악에도 한계가 있다. 그 빈 자리를 메우는 사회적 장치가 언론이다.
다른 장치와 마찬가지로 언론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정책 입안ㆍ결정 과정에서 일일이 설명해야 하니 성가시기 짝이 없다. 수시로 전화를 걸거나 찾아와 업무를 방해하기도 한다.
민주 정부라면 국회 대책으로 밤을 지새듯, '언론 비용'을 지불하게 마련이다. 이런 비용을 줄인다고 기자실을 때려 합치겠다니, 국회의 잔소리가 귀찮아 아예 권력의 시녀로 만든 유신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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