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후 8시께(현지시간)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 국제공항 2터미널.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7월19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단체에 납치돼 40여일간 억류돼 있다 지난달 28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석방된 피랍자 19명이었다. 드디어 ‘직접’ 만났다.
▦31일 석방 실감한 두바이의 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고 어두웠다. ‘자유의 몸’이 된 환희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석방 후에야 고 배형규(42) 목사와 심성민(29)씨의 피살 소식을 접했던 슬픔과 충격 탓일까. 19명 모두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은 피랍 생활의 공포감 뿐인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넋 나간 표정과 겁먹은 눈빛으로 입국장을 빠져 나오는 그들에게 있어 ‘납치와 억류’는 여전한 현재 진행형이었다.
공항에서 대기 중인 49인승 버스에 서둘러 올라탄 이들은 숙소인 ‘두짓 두바이 호텔’로 향했다. 30여분 만에 호텔에 도착한 후 최연장자인 유경식(55)씨와 서명화(29ㆍ여), 고세훈(27)씨가 석방자 대표로 나서 간단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집으로 가는 심정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유씨는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답했다. 아프간 카불의 세레나호텔에서의 석방 후 첫번째 기자회견에서의 말과 똑같았다. 이들은 마치 ‘죄인’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뗐고, 10여분간의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생환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안도의 웃음 한번 없이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이라니, 기자 역시 취재현장이 불편했다.
정부 당국은 이들을 철저히 ‘보호’했다. 이들은 호텔 맨 윗층(37층)의 20여 개 객실에서 1인 1실로 묵었다. 아내 서명화(29)씨를 만나러 한국에서 날아와지만 객실 밖으로 나와야 했던 이성현(33)씨는 “몸 상태는 별다른 부상 없이 양호한 상태였지만 몇몇 여성은 동료 2명이 살해당했다는 충격에 밤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며 “한국에서의 비난 여론도 어느정도 알고 있어 정신적 충격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걱정했다.
▦1일 고국으로 출발
1일 오후 4시25분(현지시간)께 다시 두바이 국제공항. 이집트 카이로를 출발, 두바이를 경유해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KE952편에 석방자 19명과 함께 올랐다. 이 노선의 항공기는 원래 261석 규모의 보잉 772 기종이지만, 이들과 정부 관계자 등을 태우기 위해 335석의 보잉 747기로 긴급 변경했다.
정부는 피랍자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24석인 2층 비즈니스석 전부를 빌려 일반인들과 분리해 탑승시켰다. 피랍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피곤이 가시지 않은 듯 비행기를 타자마자 귀국길 동안 잠을 청했다.
일부 여성들은 기내에서 제공하는 담요로 얼굴까지 덮은 채 외부의 시선을 철저히 피했고, 차혜진(31)씨 등은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피랍자들은 8시간 30분 간의 귀국길 동안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가끔씩 서로의 손을 잡기만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두바이 호텔에서 기자들 앞에 나서 협상 과정을 설명했던 김만복 국정원장 등 정부 관계자들만 시종 밝은 표정이다.
▦ 2일 드디어 가족의 품에
2일 오전6시35분께 인천국제공항. 아프간으로 떠난지 51일 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다.
19명이 오후7시께 탑승로를 빠져나가면서 취재진 30여명의 열띤 카메라 플래시와 질문 세례를 받았지만 묵묵부답,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특별히 마련된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이들은 정부 관계자와 미리 입을 맞춘 듯 입국장을 지난 뒤 간단한 귀국 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유경식씨는 “사랑을 나누기 위해 갔는데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드리고 정부에 부담을 주어 대단히 죄송하다”고 다시 한번 사과했다. ‘석고대죄’란 표현까지 나왔다. 이 자리에는 배 목사의 형 신규(45)씨 등이 비명에 간 배 목사와 고 심성민씨의 영정 사진을 들고 서 있어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둘러 기자회견을 마친 뒤 경기 안양 샘병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얼굴에 기쁜 빛이 스쳐갔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만남을 앞둔 격정을 감추기 어려운 듯 했다.
오전8시께가족들의 품에 안겨 서로 쓰다듬는 이들의 얼굴에서 31일 이후 처음으로 평범한 이의 눈물과 웃음이 번져 나왔다. 어느새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이들은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았고, 가족 재회가 준 심리적 안정감 덕분인지 한결 편안해 하는 모습들이었다.
김정우 기자 wook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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