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58) 시인이 아홉번째 시집 <포옹> (창비 발행)을 냈다. 포옹>
전작 <이 짧은 시간 동안> 을 낸 지 3년만이다. 유려한 문학적 상상력을 평이한 어휘, 잠언 풍의 간결한 문구에 실어놓는 시인 특유의 결이 가지런한 65편의 시가 실렸다.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정신도 여전히 묵직하다. 이>
변화도 감지된다. “아버지가 내 시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는 정씨의 표현대로 그의 이번 시집에는 아버지에 관한 시편이 여럿이다.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나팔꽃> 에서). 나팔꽃>
정씨의 아버지는 지난해 아들의 부탁으로 테레사 수녀에 관한 사진에세이집(20면 참조)을 번역한 직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가 지금은 거동이 가능할 만큼 회복됐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못> 에서)란 구절은 공중목욕탕 때밀이용 침상에서 본 아버지의 노구에서 착상됐다. 못>
몇 해 전부터 부모님 댁 빈 방에 작업실을 마련한 정씨는 “어쩔 수 없이 소멸을 향해 가는 아버지의 일상을 지켜보며, 살아간다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고 말했다.
그의 삶을 향한 시선이 더욱더 낮아지고 섬세해졌다는 인상도 받는다. 정씨는 “시에는 상상, 추상, 관념도 필요하지만 이 세 가지를 구체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로 이런 느낌을 확인해준다. 이번 시집에 실린 ‘밤의 연못’ ‘밤의 강물’ 등에서 느껴지는 시각적인 힘은 삶의 세부를 구체적인 시적 이미지로 포착하려는 그의 의지의 결실이다.
“시집은 단순히 문예지 발표작을 모아 내는 매체가 아니라 새로 쓴 시를 선보이는 발표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정씨는 이번에도 40여 편의 신작시를 실었다. 그가 시를 쓰는 스타일은 독특하다.
평소에 생활의 도처에서 시상을 붙잡아 메모해뒀다가 그 분량이 노트 한 권을 빼곡히 채울 즈음 6개월 가량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집중적으로 시를 짓는다. 정씨의 시집이 탄탄하고 응집력 있는 구성을 갖추는 것은 이런 작업과정과 관계 깊다.
그에게 시는 언제나 ‘소통’이다. 1970년대 중반 김명인 김승희 시인 등과 ‘반시(反詩)’ 동인을 결성했던 그는 동인지 창간호에 적었던 “일상의 쉬운 언어로 현실의 이야기를 시로 쓰고자 한다”는 출사표를 변함없는 창작의 좌표로 삼아왔다. 대신 시대적 상황과 타인의 눈물을 그 ‘현실’의 전부로 여겼던 문청 시절에서 벗어나 “나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도 현실”이라는, 한결 넉넉한 시선을 갖추게 됐다.
73년 등단부터 따지면 정씨의 시력은 올해로 34년. 열번째 시집을 앞두고 ‘아홉수’를 어떻게 넘어갈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법정 스님에게서 들었다며 “가정을 위해, 사회를 위해 충분히 일을 했다면 남은 시간은 자신을 위해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제 내게도 여생을 나를 위해 쓸 줄 아는 슬기가 필요합니다. 시인이 자족적으로 시간을 쓰는 구체적인 방법은 시를 쓰는 것이죠. 시인은 시를 품고 있어서는 안되고,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사람들과 만나야 합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