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원로들이 뛰고 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들, 그리고 일선에서 은퇴한 거물 정객들이 이번 대선 국면에 앞 다투어 뛰어들고 있다.
이들은 대선과 관련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거침없이 쏟아내거나, 대선후보를 중심으로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지지 세력에게는 단합을 주문하고, 상대방에는 비판 발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한나라당 후보가 확정되고, 범 여권의 경선레이스가 본격화하면서 이들의 싸움은 더욱 구체화, 노골화하고 있다. 가히 '상왕(上王)들의 전쟁'이라고 부를 만 하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쪽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등이 서 있다. 이중 김 전 대통령과 이기택 전 총재는 경선 때부터 이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후보가 정해지지 않은 범 여권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명예사령관' 역할을 하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실상 민주신당을 지지한 상태다. 이밖에 정치권 외곽에서 맴돌던 이수성 전 총리는 신당창당을 모색하고 있으나, 여권의 아류로 분류된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영원한 라이벌인 김영삼(YS)-김대중(DJ) 두 전직 대통령에게서 비롯됐다. 시동은 DJ가 먼저 걸었다.
그는 지난해 말 호남을 방문, 지역주의에 불을 당겼다. '목포의 눈물'을 함께 불렀고 방명록에는 '무호남 무국가(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고 적었다. 이어 햇볕정책 등 지속적인 대북 포용책을 강조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범 여권통합을 주문했다. 그리고 발언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가만있을 리 없다. 그는 대북 포용정책을 옹호하는 DJ와 노 대통령을 반역주의자로 공개적으로 몰아붙였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경선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이명박 후보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는 등 이 후보를 적극 도왔다.
김종필 전 총리도 지난해 말 북핵 사태이후 노 대통령을 원색 비난하면서 보수진영을 대변했고, 29일에는 이 후보 앞에서 DJ의 정치간여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나를 부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노 대통령은 부지런히 자신의 정견을 밝히다 선관위로부터 몇 번의 경고를 받았을 정도다. 한나라당과 이 후보에 대한 비판은 아예 직설적이다. 그러다 범 여권후보가 결정되면 DJ와 함께 연합전선을 펼 것이란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들이 대선 판에 뛰어든 일단 자신들이 지지하는 세력의 정권창출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동시에 각자의 정치적 계산과 입지를 감안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념적으로 극명하게 갈린 대선구도에서 자신과 관련된 정파의 승리가 자신의 안위에 직결한다는 생각이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경우 퇴임 후 개혁세력을 중심으로 한 영향력 유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분석이 무성하다. DJ는 자칫 정권이 한나라당에 넘어갈 경우 자신의 햇볕정책과 남북화해 업적 등이 격하되거나 부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필사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관측이다.
김종필 전 총재와 이회창 전 총재의 경우는 친북 좌파로 규정하고 있는 현 정권을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는 나름의 강력한 우파 이념이 동인(動因)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동질성 있는 세력이 정권을 잡아야 본인의 활동공간이 커진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YS도 우파의 승리를 원하는 것은 앞의 두 사람과 같지만, 왕성한 정치활동을 통해 아들의 차기 총선출마 길을 열어주려 하는 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이렇게 보면, 정치원로들을 대선 판에 끌어들인 가장 큰 요인은 이번 대선에서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 보수 대 진보의 제로섬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적게는 개인의 이해, 크게는 철학과 명예를 걸고 싸움에 휘말리고 있는 셈이다.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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