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장의 거대한 사진이 있다. 세로 30㎝에 폭이 무려 3m나 되는 이 기다란 사진 안에서 수십 명의 여자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며 쾌락을 탕진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째 눈에 설지 않은 포즈들이다.
특유의 중국풍이 또렷한 사진 속에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마네의 ‘올랭피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앵그르의 ‘목욕하는 여자’ 등이 중국 여인들의 살진 몸을 통해 고스란히 재연(再演)돼 있다.
서구미술사를 고약하게 비틀어 압축해 놓은 이 사진의 제목은 ‘차이나 맨션’(2003). 소비와 향락의 허무가 과장된 몸짓 속에 즐비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공간이다.
소비 자본주의와의 충돌이 빚은 외상 혹은 내상을 위트와 풍자의 시선으로 집어내는 중국 현대사진작가 왕칭송(41)의 첫 개인전이 서울 화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중국 예술계의 가장 논쟁적인 사진작가인 그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브레송 식의 주류미학과 달리 극적으로 연출된 ‘액션포토’(action photo)들을 찍는다.
대표적인 중국 1세대 사진작가로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던 중국 사진예술을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중국사회를 풍자하는 시각미술의 한 장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차이나 맨션’처럼 미술사의 명장면들을 빌어오거나 일상의 친숙한 기호들을 차용해 소비가 제왕으로 군림하는 후기 자본주의적 삶에 냉소를 퍼붓는 그의 작품들은 조악(粗惡)에의 의지를 한껏 뽐내는 키치미학의 골수를 보여준다. 초기엔 자화상을 주로 찍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과감한 세트를 배경으로 다양하게 연출된 군상들의 모습을 찍으며 작업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초기작인 ‘수감자’(1998)는 코카콜라 캔들이 감옥의 창살로 둔갑해 작가를 가둬놓은 형상을 통해 소비의 포로가 된 현대인의 모습을 강렬하게 도상화한다.
‘포럼’(2001)에서는 ‘현대문명재건 국제포럼’이라는 황당무계한 행사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작가의 ‘포커페이스’를 통해 자본주의 문명에 유머러스한 풍자의 메스를 들이댄다.
‘또 다른 전투’(2001) 시리즈는 집단 군상을 통해 웅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최근 작업들을 대표할 만하다. 맥도날드 간판을 향해 전진하는 군인들과 부상당한 작가의 모습이 소비의 표상을 향해 맹전진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꼬집는다.
중국 인민들이 맥도날드와 페덱스 등 다국적기업의 중국 진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오라! 오라!’(2005) 역시 마찬가지.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민자들의 꿈’(2005)은 공산주의적 정서의 잔재와 급속한 자본주의 경제 성장이 충돌하는 가운데 개인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동경, 국가 발전이 초래하는 개인의 희생을 묵인하는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시선의 비틈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왕칭송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구겐하임미술관 등 국제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가로든 세로든 최소 1m가 넘는 ‘대작’ 16점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9월 29일까지 계속된다. (02)734-9467~8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