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미국 맨해튼의 뉴욕의학아카데미에서 열린 그림 전시회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화가 윌리엄 어터몰렌(현재 74세)의 자화상 전시회로, 미국 알츠하이머병협회가 치매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환기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치매에 걸리기 훨씬 전인 34세 때 그린 흑백 자화상을 보면 반짝이는 눈이며 머리털 한 올까지 섬세하면서도 시원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노인성 치매 발병 1년 후인 63세 때 그린 컬러 자화상만 해도 세부 묘사는 사라졌지만 특징만을 간결하게 잡아낸 터치가 돋보인다.
■그러나 같은 해 말에 그린 자화상부터는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이마에서부터 코까지 윤곽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힘이 빠진다. 이어 두 눈이 어긋나고 코가 뭉개진다. 66세 때의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붓을 놓기 직전인 67세 때의 스케치는 숨 쉬는 콧구멍 두 개만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뿐 나머지는 둥그런 형상에 연필 터치만 무수하다. 윤곽선이 서서히 무뎌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와해되고 마는 것은 자의식 내지 인식능력이 총체적으로 허물어지는 양상을 보는 것 같다. 한 인간이 해체되는 과정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어터몰렌씨의 사례에서 한 인간을 구성했던 그 모든 기억이 송두리째 씻겨나가고 생물학적 기능정지만을 남겨둔 사람을 우리가 알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의문이 남는다.
반면에 아이작 아시모프의 SF소설 〈바이센테니얼 맨〉에서는 신체ㆍ지능ㆍ정서적인 면에서 완벽한 인간의 수준으로 진화한 로봇 앤드루는 죽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결국 앤드루는 제작된 지 200년 되는 날 삶을 지탱해온 그 모든 기쁘고 슬픈 기억을 나눌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으로 인정 받는다.
■산 채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생생한 기억을 간직한 채 영원히 혼자 살아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인간은 모두 죽는다.
치매로 죽어가느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느냐, 암으로 생을 마감하느냐는 어찌 보면 모두 죽음에 이르는 한 방식인 것 같다. 치매노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 본인도 불가항력이지만 가족들 힘만으로는 제대로 모시기 어렵다.
마침 서울시가 지역치매지원센터를 현재의 4곳에서 2010년까지 25곳으로 늘린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국가와 사회가 치매 노인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쏟아야 할 때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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