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납치 사건을 통해 탈레반은 ‘몰락한 테러리스트 집단’에서 ‘국가와 동등한 지위’로 격상된 셈이 됐다. 인질과 동료 수감자의 맞교환이라는 애초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전문가들은 탈레반이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성과를 얻었다고 분석한다.
애초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으며 탄생한 탈레반은 1996년 소련의 괴뢰정부를 무너뜨리고 아프간의 실질적인 통치세력이 됐다.
그러나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가 2001년 9ㆍ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넘기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자, 미국은 아프간을 침공해 탈레반을 아프간 남부로 축출해 버린다. 이후 어떤 정부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격하된 탈레반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탈레반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대면 협상을 진행했다. 아프간 정부와 인도네시아 대표단, 적신월사 대표까지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대변인을 통해 해외 언론들에 적극적인 미디어 선전전을 진행함과 동시에, 2001년 정권 붕괴 후 처음으로 두 차례나 공개적인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한국 정부로부터 아프간에 파견한 한국군의 연내 전원 철수, 아프간 내 한국 민간인 철수와 기독교 선교단 입국 금지 등의 약속을 이끌어 낸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한국 정부가 이미 계획했던 것이라고는 하지만 몰락한 무장단체가 외국 정부로부터 철군 약속을 받아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사상 최대 규모에 여성까지 포함된 대규모 납치로 탈레반의 악명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결국 민간인 납치라는 가장 비열하고 테러리스트적인 수단을 통해 스스로의 지위를 아프간 남부의 실질적 지배 세력으로 격상시키는 데 성공한 것만은 사실이다.
합의안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과거 테러 단체들이 인질사건을 통해 거액의 몸값을 챙겨온 것이 공공연한 비밀인 점을 감안하면 탈레반은 이번 인질석방 과정에서도 몸값을 챙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사상 최대 규모로 기록될 이번 한국인 인질 사태를 통해 탈레반은 명분과 실리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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