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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23>토리노 -리소르지멘토의 진앙(震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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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23>토리노 -리소르지멘토의 진앙(震央)

입력
2007.08.2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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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발 파리행 열차가 토리노에 도착할 시각은 밤 11시 전후였던 것 같다. 정오 전에 체크아웃을 해야 했으므로, 아내와 나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카보우르 광장 근처의 호텔을 나와 포르타 누오바 역의 코인로커에 여행가방을 들여놓았다. 가뿐한 차림으로 토리노를 살피고 파리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시내 쪽을 향해 걸어가다가 카를로 펠리체 광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또렷하지 않으나 아내와 나는 말다툼을 시작했고, 그 말다툼이 길어지자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때 그녀를 따라가 잡았어야 했는데, 그 순간의 짜증에 휘둘려 그러질 못했다. ‘가볼 테면 가보라지, 이 낯선 도시에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하는 심보였을 것이다. 서른다섯 살을 한심하게 먹은 사내의 꼬락서니였다.

담배를 거푸 두 대 피우도록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서둘러 산 카를로 광장을 지나 카스텔로 광장에까지 내달았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다시 포르타 누오바 역으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거기에도 없었다. 휴대폰이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나는 보도블록에 퍼질러 앉아 머리가 띵하도록 담배를 피웠다.

우리는 각자의 기차표를 따로 지니고 있었고 얼마 남지 않은 여비도 아내에게 있었으니, 그녀가 배를 곯거나 파리로 돌아가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처음 와본 도시에서 아내가 혼자 배회할 걸 생각하니 여간 울가망한 게 아니었다.

자책감 속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이 곳은 두메산골도 아니고, 대낮에 총질이 난무한다는 콜롬비아의 도시도 아니다. (콜롬비아 분들껜 죄송하다. 할리우드 영화가 묘사하는 콜롬비아가 하도 험하기에.......) 아직도 마피아가 설친다는 시칠리아 섬도 아니다. (시칠리아 분들께도 죄송하다. 그 곳이 마피아의 본향이라 들었기에......) 또 마피아가 있다 해도 좀스럽게, 지나가는 외국인 납치 따위나 하지는 않을 게다. 여기는 이탈리아의 현대 도시다. 현대=안전한 도시. 그리고 지금은 대낮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아내는 포르타 누오바역으로 올 게다. 파리로 가든 안 가든 자기 짐은 찾아야 할 거 아냐.’

■ 아내와 말다툼 후 홀로 낯선 도시 쏘다녀

시내에서 우연히 아내와 마주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고,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 거리로 들어서 다시 시내 쪽으로 걸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는 사르데냐 왕국의 마지막 군주이자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첫 군주였다. 그리고 토리노는 16세기 이래 사보이 공국과 그것을 계승한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였다가, 19세기 중엽 통일 이탈리아의 첫 수도가 되었다.

토리노가 이탈리아 왕국의 첫 수도가 된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자연스러웠다. 흔히 리소르지멘토(‘부흥’이라는 뜻)라 불리는 이탈리아의 국가통일과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이 토리노에 도읍한 사르데냐 왕국이었던 데다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졌을 땐 로마를 중심으로 한 라치오 지방이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베네토 지방과 함께) 왕국의 주권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이탈리아 왕국에 복속한 것은 그보다 10년 가까이 지나서였다.

토리노 하면 대뜸 떠오르는 사람이 둘 있다. 한 사람은 이 도시가 고향인 카보우르 백작 카밀로 벤소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사르데냐 왕국 총리 카보우르가 맡은 역할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가 맡은 역할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탈리아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그 시기 독일을 둘러싼 환경보다 훨씬 가혹했고, 카보우르의 조국 사르데냐의 힘은 비스마르크의 조국 프로이센의 힘보다 한결 작았으므로, 카보우르의 통일 전략은 한결 섬세하고 더러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가 몇 번 비위를 맞춰주다가 결국은 무력을 통해 영국으로 쫓아버린 나폴레옹3세에게 카보우르는 줄곧 고개를 조아렸다.

카보우르는 국가의 목표를 위해 지도자가 취할 수 있는 실용주의 노선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오스트리아를 제어할 의사와 힘이 있었던 나라는 프랑스뿐이었으므로, 그는 사르데냐의 땅덩어리 일부를 프랑스에 떼어주면서까지 나폴레옹3세의 환심을 샀다.

그는 또 마치니 등이 주장한 즉각적이고 공화주의적인 통일운동이 국내외의 반동을 불러와 통일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을 염려해, 사르데냐왕국을 중심으로 한 점진적이고 입헌군주제적인 통일노선을 취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리소르지멘토의 기획자이자 완성자가 되었다. 리소르지멘토라는 명명 자체도 카보우르가 1840년대에 발간한 정치신문의 제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 노동-자본 대결 ‘이탈리아의 디트로이트’

또 한 사람은 고향?토리노가 아니지만, 토리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토리노에서 지적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그람시다. 미국인 지성사가 스튜어트 휴스는 그람시를 “20세기의 모든 이론가와 실천가들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가장 정교하고 독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사람”이라 평한 바 있다. 이 평가가 설령 과장돼 있다 하더라도, 서유럽 마르크스주의나 소위 유로코뮤니즘에 대한 그람시의 영향력은 한 때 절대적이었다.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리 20세기 초 발달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그람시는 ‘문화 헤게모니’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람시가 보기에 당대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했다.

자본주의는 폭력이나 정치경제적 강제를 통해서만 유지되는 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가치들을 일종의 ‘상식’으로 만드는 헤게모니 문화를 통해 유지되는데, 당대 부르주아의 문화 헤게모니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이 문화헤게모니에 휘둘려, 노동계급 사람들은 부르주아에게 이로운 것이 자신들에게도 이롭다고 여기게 되고, 그래서 혁명보다는 현상유지를 바라게 된다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의 가치들에 자연스러움과 규범성을 부여하는 이 문화헤게모니의 전복을 그람시는 계급투쟁의 중심에 놓았다.

그람시의 이론과 실천이 토리노에서 시작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19세기 말 자동차 제조회사 피아트가 들어선 뒤 토리노에는 숙련노동자들이 바글거렸고, 이 ‘이탈리아의 디트로이트’는 노동과 자본의 두드러진 싸움 현장이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지도한 것은 채 10년도 못 됐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1929년 내란선동 혐의로 그를 투옥했기 때문이다. 기소될 때 그람시는 국회의원 신분이었다.

검사는 법정에서 “우리는 20년 간 이 두뇌의 기능을 멈추어야 한다”는 유명한 논고를 했다. 그람시는 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 형을 다 채우지 못했다. 8년간의 옥살이로 건강이 악화돼 가석방된 직후 죽었기 때문이다. 46세였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옥중에서 쓴 것이다.

■ 유럽 명문 축구클럽 유벤투스의 고향

토리노가 배출한 이름 가운데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유럽 최고의 프로축구 클럽 가운데 하나인 유벤투스 FC일 테지만, 이 도시는 역사가 기록할 만한 이름을 그밖에도 여럿 낳았다. 우선 물리학자 아보가드로와 수학자 라그랑주,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정치사상가 노르베르토 보비오, 화학자 출신 작가 프리모 레비 같은 이들이 토리노 출신으로서 지성사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보다 더 흥미로운 이들은 토리노 출신의 사업가들일 게다. 타자기, 계산기, 컴퓨터 따위로 유명한 올리베티사의 창업자 카밀로 올리베티, 피아트의 창업자 조반니 아?疸? 세계 최초의 대규모 초콜릿공장을 만든 피에르 폴 카파렐, 베르무트 제조회사 마르티니 앤드 로시의 창업자 알레산드로 마르티니가 그들이다.

피아트와 올리베티가 토리노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이름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토리노는 초콜릿과 베르무트의 고향이기도 하다.

■ 고체 초콜릿 18세기말 첫 탄생

우리가 보통 초콜릿이라고 부르는 고체 초콜릿이 처음 만들어진 게 18세기 말 토리노에서였다. 그 전까지의 초콜릿은, 한국에서 보통 코코아라고 부르는 액체 초콜릿이었다. 또 와인에 브랜디나 당분을 넣은 혼성주 베르무트를 처음 만든 이도 토리노 출신의 안토니오 베네데토 카르파노였다.

역시 토리노 출신의 사업가 알레산드로 마르티니가 제 이름을 따 세운 베르무트 제조회사는 이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주류회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베르무트와 진을 섞어 올리브로 장식한 칵테일 ‘마티니’의 어원이 바로 마르티니가 창업한 마르티니 앤드 로시다. 마티니를 발명한 것은 미국인이지만, 그 어원은 이탈리아사람 이름에 있는 것이다.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 앞에서 정겨운 얼굴의 여자가 눈에 익은 걸음걸이로 어정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손을 잡고 성당으로 들어갔다.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토리노의 성의(聖衣)’를 보기 위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그 유명한 수의(壽衣)는 없었다. 어딘가에 따로 보관돼 있다 한다.

오랜 세월 이리저리 떠돌다 15세기 무렵 사보이가(家)(사보이공국과 사르데냐 왕국, 이탈리아 왕국의 왕실) 사람들 손에 들어왔다는 이 수의는, 적잖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 입었던 옷으로 여겨졌다. 1988년에 그 상상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방사성탄소의 붕괴를 이용해 연대를 재본 결과 수의가 13세기 것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마다마 궁전이 보이는 카스텔로 광장의 한 카페에서 아내와 나는 이른 저녁을 먹었다. 밤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므로, 우리는 남은 여비를 거의 다 털어 부었다. 오랜만에 대하는 성찬이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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