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캠프 해단식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 후보에 대한 협력의사나 정권교체 당위성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시사점이 크다.
박 전 대표는 인사말에서 지지자들에 대한 감사와 미안한 마음만 전했다. 이 후보와의 회동에 대해선 "생각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20일 전당대회 경선 패배 직후엔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고 천명한 그였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태도는 실질적 화해와 협력을 위한 이 후보측 움직임이나 객관적 상황이 아직 충분치 못하다는 암시로 해석할 수 있다. 섣불리 혼자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 후보측 접근방식이 미숙했다는 지적이 있다. 이재오 최고위원이 박 전 대표 진영의 반성을 촉구해 쓸데 없이 상대를 자극한 게 대표적이고, 일각에서는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당직을 이 후보측 색채가 강한 인사들로 서둘러 채울 필요가 있었느냐는 자성도 나오고 있다.
경선과정에서 망가진 이 후보와 박 전 대표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혹시 이 후보가 박 전 대표의 삼성동 자택을 전격 방문, 협력을 구하는 이벤트 한방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誤算)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판을 깨는 자살 골이 될 수 있다. "승복을 한 이상 적당한 모양을 갖춰주면 돕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고는 위험천만이다.
이 후보가 박 전 대표의 도움이 대선승리에 필수적이라고 여긴다면 철저히 박 전 대표의 입장에서 해법을 찾는 게 당연하다. 경선 기간 내내 "이명박으로는 정권교체가 안 된다"고 설파한 박 전 대표다.
이 후보의 대표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선 시대착오적이라고 폄하했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려면 그 동안의 언행을 번복할만한 명분과 성의, 희생을 보여야 한다.
불과 1.5% 포인트 차이로 석패 했으면서도 즉석에서 흔쾌히 승복을 한 것으로 박 전 대표는 1차적 도리를 다하고 공을 이 후보쪽에 넘긴 셈이라는 견해도 상당하다. 이제는 이 후보가 박 전 대표의 손을 잡기 위해 그쪽으로 다가서야 할 차례라는 것이다.
이 후보측 한 의원은 두 사람 관계를 노사(勞使)에 비유했다. 승리한 이 후보가 사용자로서 강자인 것 같지만 노조위원장격인 박 전 대표가 단체협상에서 합의도장을 찍어주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얘기다. 역시 이 후보가 설득력 있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차기 당권, 공천지분, 총리 보장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협상조건은 현 정당구조와 사회분위기, 그리고 박 전 대표의 스타일에 비추어 실효성 있는 카드가 될 수 없다.
이 후보도 이런 것들로 주고받기를 할 생각은 아닌 듯 하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측 한 인사는 "박 전 대표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건 진심과 명분"이라고 말했다.
머리에 쥐가 날 만큼 어려운 숙제다. 상황이 이렇다면 양측의 물밑 타진이나 사전 정지작업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미는 감지되지 않는다.
박 전 대표를 잡아야만 충성도가 유독 강한 박 전 대표 지지자들을 이탈 없이 흡수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후보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유성식 정치부장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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