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1929년에 쓴 시 <동방의 등불> 은 식민지 조선에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던졌다. 당시 타고르의 주된 방일 목적 가운데 하나가 망명 독립운동가 수바시 찬드라보스(1897~1945)와의 만남이었다. 이 시가 탄생한 계기인 동아일보 도쿄 지국장과의 만남도 찬드라보스가 주선했다. 동방의>
찬드라보스는 무장투쟁 색채가 강한 독자적 노선을 걸은 인도 독립운동의 영웅이다. 독일의 대영 전쟁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지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판단과 식민지 해방에 대한 기대가 작용했다.
■1946년 4월에 시작돼 2년 반 동안 열린 도쿄 전범재판에서 11명의 재판관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던 라다비노드 팔(1886~1967)도 타고르나 찬드라보스와 같은 콜카타(캘커타) 출신이다. 그는 생전에 여러 차례 일본 우파의 초청을 받았고, 야스쿠니(靖國) 신사의 유슈칸(遊就館) 앞에 공적비도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런 점만으로 그를 침략전쟁 옹호자로 내몰기는 어렵다. 실정법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그의 '일본 무죄론'은 소급입법으로 전쟁범죄를 재단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게 핵심이었다.
■즉, 도쿄 전범재판이 규범으로 삼은 '극동군사재판 헌장'에 규정된 '평화에 대한 죄', '인도(人道)에 대한 죄'는 사후입법에 지나지 않아 재판규범으로 삼을 수 없고, 따라서 범죄를 재단할 규범이 없으므로 무죄라는 것이었다.
많은 오해와 달리 그는 난징(南京) 대학살에 대해 "관련 증언이나 기록에 담길 수 있는 과장을 참작하더라도 잔학행위가 있었다는 증거는 명백하고 압도적"이라고 보았다. 미국의 원폭 투하를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교하며 비난했던 것도 절대적 평화사상과 끊어서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지난 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박3일의 바쁜 인도 방문 일정을 쪼개서 수도 뉴델리에서 1,100㎞ 이상 떨어진 콜카타를 찾았다. 팔의 아들과 찬드라보스의 조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과거 행위를 남달리 정당화한 듯한 두 인도인의 후손을 공들여 만난 아베 총리의 주관적 의도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일본의 의도만을 근거로 팔이나 찬드라보스를 비난하는 것은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일본 우파보다 나을 게 없다. 독립운동가였던 찬드라보스는 물론이지만 개인적ㆍ직업적 신념에 근거한 팔의 언행에 대해서도, 사고의 궤적을 훑어본 후 비난해도 늦지 않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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