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성전자의 울트라 뮤직폰(일명 '비욘세폰')은 미국의 팝스타 비욘세를 모델로 내세워 올해 해외시장에서 출시 5개월 만에 무려 100만대를 판매했다. 이 제품의 두께는 불과 9.4㎜. 이 정도로 얇으면서도 단단함을 유지하려면 금속인 마그네슘을 외장재로 써야 한다.
하지만 비욘세폰은 삼성전자가 개발한 신소재 'XF4150(유리섬유 강화 나일론)'을 채용했다. 덕분에 원가는 마그네슘의 절반으로 줄어든 반면, 수율(정상제품 비율)은 35%에서 80%로 올라갔다.
#2. 올해 1분기 세계 컬러레이저 프린터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약진은 두드러졌다. 시장 점유율이 지난해 같은 기간 7위(4.7%)에서 1년 만에 2위(12.7%)로 수직 상승했다. 공격적인 마케팅도 주효했지만 뛰어난 성능이 결정적이었다.
기존 제품들은 분당 30장 이상 고속 프린팅을 할 경우 토너가루가 종이의 끝에 간혹 묻어 나오는 결함이 있었지만, 삼성전자는 신기술로 이를 극복해 세계 최고 수준의 인쇄 상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창의적 사고에도 지름길이 있다
삼성전자는 어떻게 이런 첨단 신소재를 개발하고, 프린터의 고질적인 결함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두 사안에 공동 적용된 창의적 비법은 바로 발명 문제 해결 이론으로 불리는 '트리즈(TRIZ)'다.
트리즈는 1940년대 소련 해군 특허청에 근무하던 발명가 겐리흐 알트슐러가 동료들과 수 십년에 걸쳐 약 150만건의 전세계 특허를 분석, 발명의 원리와 패턴을 찾아내 창의적 사고의 프로세스를 정립한 것이다.
40가지 발명 원리 등 방대한 체계로 구성된 트리즈의 골자는 1단계 모순상황 발견, 2단계 이상적인 상태 설정, 3단계 모순극복 방안 모색이다.
비욘세폰을 예로 들어 보자. 슬림폰 외장재로 쓰이는 마그네슘의 경우 강도는 좋지만 수율이 떨어지고 비싸 대체 소재가 절실했다. 일단 대체 신소재는 플라스틱처럼 가공성(유연성)이 좋으면서도 금속만큼 강해야 하지만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1단계 모순상황).
유연성과 강도를 모두 겸비한 신소재라야 한다(2단계 이상적인 상황). 트리즈 발명 원리 중 하나인 두 가지 특성이 있는 자료를 합쳐 보는 '복합자료의 원리'를 적용하니 문제가 풀렸다.
플라스틱 수지(유연성)와 유리섬유(강도)를 일정 비율로 혼합해 세상에 없던 새 물질을 만들어낸 것. 프로젝트를 수행한 무선사업부 김우석 책임연구원은 "그 동안 발명이나 발견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거나 우연한 기회를 통해 이뤄졌다"며 "하지만 트리즈를 이용하면 체계적이고 손쉽게 해답을 얻게 돼 '창의적인 사고와 발명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밑으로부터의 혁명
삼성전자 사업장에 트리즈 열풍이 불고 있다. 트리즈가 삼성전자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8년이지만, 그 동안 큰 진척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창조경영이 강조되고, 트리즈를 적용한 성공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이를 배우려는 임직원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트리즈 강좌를 수강한 사람은 2,000명에 불과했지만, 올해 들어선 7월까지 5,500명을 넘었다. 연말까지 1만명에 달할 전망이다. 지난해(1,300명)에 비해 약 8배나 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기업경영 혁신도구로 인기를 모으는 '식스 시그마'와 트리즈는 어떤 차이가 있을 까. 삼성전자 트리즈 추진 사무국의 이준영 사무국장은 "식스 시그마가 통계적인 방법으로 생산현장의 효율성을 높이는 툴이라면, 트리즈는 기존 구조와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조와 아이디어로 문제해결을 도와준다"며 "연구원들이 기존 방식으로 풀기 어렵다며 덮어두었던 난제들에 대해 트리즈를 적용, 다시 해결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매년 15%씩 증가하는 특허 출원 건수가 올해 더욱 늘 것으로 전망된다.
트리즈 열풍의 효과는 관리와 효율로 상징되는 삼성의 기업문화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창조와 상상력 발현의 노하우를 익힌 임직원들이 앞 다퉈 자체 워크숍을 갖는가 하면, 트리즈를 통해 아이디어를 내려는 붐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회사 차원의 트리즈 사무국 외에 사업부별로 12개의 트리즈 연구회가 활동 중이다.
이준영 사무국장은 "톱-다운(Top-Down) 매니지먼트(하향식)에 능한 삼성의 기업 풍토에 창조경영과 트리즈 열풍이 맞물리면서 조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는 바텀 업(Bottom-Up) 매니지먼트(상향식 관리)의 새 기운이 번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밑으로부터 조용한 혁명이 일고 있다는 얘기다. 과연 이 혁명이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박진용 기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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