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어디엔가 “계몽은 끝나지 않았으나, 이미 계몽의 시대는 지났다”고 쓴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맹아의 형태로 보았던 그것이 지금은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요즘 대중들은 여기저기서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 반발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대중지성’이라는 말로 축성하기에 바쁘다. 대중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진정으로 ‘지성’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고려 없이, 그저 대중들이 케이블로 연결만 시켜놓으면 거기서 저절로 지성이 나온다는 식이다. 디지털 신비주의?
언론에서 떠드는 대중지성이란 게 얼마나 허망한지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고작 영화 한 편에 사회 전체가 들썩이는 것도 그 잘난 대중지성이 연출한 해프닝이다. 돌멩이를 산더미처럼 쌓아봐야 어차피 돌무더기, 거기서 저절로 지성이 나오는 건 아니다.
흔히 웹 2.0 시대에 대중지성의 대표적 예로 거론되는 것이 ‘위키피디아’ 사전이다. 실제로 사용해본 내 경험에 따르면, 위키피디아의 수준은 때로 활자로 된 사전을 능가한다. 활자사전의 콘텐츠가 과거에 속한다면, 수시로 업데이트가 되는 전자사전은 늘 현재를 살기 때문이다.
이 사전의 항목을 쓴 대중들은 어떤가? 그들은 감정적 악다구니나 늘어놓는 떼거리가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꽤 높은 식견을 가진 고독한 개인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전문가들이 쓴 텍스트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고, 인용한 텍스트들의 출처를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텍스트 문화의 합리성이 네트워크와 결합한 결과다. 사실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보라. 얻을 만한 정보가 거의 없다. 간혹 있는 것도 대개 외국 사이트의 것을 퍼다가 번역해 놓은 것. 한국의 인터넷에는 정보가 아니라 주로 반감과 교감이 흐른다.
왜 이렇게 됐을까? 거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서구의 경우 늦춰 잡아도 이미 백수십년 전에 모든 시민이 문자를 읽고 쓰는 텍스트 문화로 진입했다. 17세기 합리주의, 18세기 경험주의, 19세기 계몽주의를 거쳐 텍스트 문화에 걸맞는 의식구조를 확립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해방 직후 문맹률이 거의 90%에 달했다. 오늘날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저 글자만 읽고 쓴다고 의식마저 문자문화의 합리성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 수백년이 걸린 일을 수십년에 완수하기란 어차피 어려운 일. 서구의 경우 텍스트의 바탕 위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로 진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텍스트의 토대 없이 바로 이미지와 사운드로 나아가고 있다. 이게 한국 디지털 문화의 한계다. 이는 물론 우리에게 부족한 텍스트 문화의 합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인터넷의 상황은 어떤가? 도처에서 들리는 것은 외려 반지성주의 선동이다. 계몽의 시대는 지나갔다, 전문가의 시대는 끝났다, 대중의 시대가 왔다, 우리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 대중의 이 자부심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오늘날 대중은 계몽주의 시대처럼 문맹이 아니다. 게다가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매체로 무장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먹물들이 주로 사용하는 인쇄매체보다 더 진화된 미디어다. 그러니 감히 자기들을 가르치려 드는 먹물이 우습지 않겠는가?
“계몽은 끝나지 않았으나, 이미 계몽의 시대는 끝났다.” 아직 문자문화의 합리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문자문화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그러다 보니 사회 전체가 합리성 없는 구술문화, 텍스트 없는 영상문화의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대중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도 ‘지성’을 낳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로 떨어진 개별적 감정 덩어리들은 인터넷을 통해 하나로 뭉친 후, 마치 낭인처럼 사이버 공간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배출구를 찾으면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문자문화의 합리성으로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디지털이라 하더라도 결국 문자문화 이전의 영상문화와 구술문화로 퇴행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보는 책일수록 그림이 많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일수록 어투가 구술체에 가깝다.
논리적 연관을 따지는 합리적 사유 대신에 허무맹랑한 신화적 사유, 영웅담 좋아하는 구술적 사유가 들어서고 있다. 대중들은 머리를 모아 ‘지성’을 이루는 대신, 영웅과 더불어 신화를 창조하려 한다. 그 영웅은 물론 황우석일 수도 있고, 심형래일 수도 있다.
게임과 현실은 묘하게 교차한다. 참가자들이 집단으로 직접 플롯을 짜나가는 온라인 게임처럼, 현실에서도 게이머들은 자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싶어 한다. 황우석과 심형래는 그렇게 해서 불려나온 거대한 리얼리티 게임 속의 주인공일 뿐이다.
한마디로 황우석과 심형래의 비판자들을 향한 대중의 분노는 이른바 게임의 환상이 깨지는 데 대한 노여움이다. 게임을 할 때 상대보다 더 얄미운 것이 게임 자체를 비웃는 자, 이른바 ‘게임을 망치는 자’(Spielverderber)다.
과연 이런 것이 대중지성인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대중’일지는 모르나 ‘지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반지성주의가 때로는 글자 그대로 파시즘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가 있다.
얼마 전 유엔에서 우리나라의 순혈주의 문화에 인종차별적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문제에 관한 토론을 마치고 게시판에 들어가니, 온통 혈통의 신화를 부르짖는 대중의 아우성뿐이다.
“솔직히 히틀러 총통께서 인종 청소를 안 해주셨으면 지금 유럽은 열등 유태인들로 인해 온갖 악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위대한 히틀러 총통의 정기와 근성을 지닌 위대한 독재자가 출현하여야 한다.”
먹물들의 토론에 분노한 대중의 지성(?)이 외친다. “단군 왕검이시여, 그리고 조상님들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펴주소서. 민족주의 만세! 순혈주의 만세!!! 이번 토론에서 국제화 운운하는 민족의 반역자들은 동남아 열등인종들과 함께 대량 멸절시켜야 한다. 배달민족 만세다.”
■ 튜링 머신과 대중지성
갑자기 대중지성이 상찬받는 데는 무슨 대단한 이론적 배경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정보도 상품인 이상, 소비자의 기호에 맞아야 하고, 지식도 상품으로 팔리려면 소비자의 입맛에 맞춰야 한다. 대중은 물론 자기가 똑똑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
대중지성을 얘기하는 이들은 종종 네트워크로 연결된 두뇌는 그 어떤 전문가의 두뇌도 뛰어넘는 능력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하는 것이다. 증명이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개별 지성도 뛰어넘는다는 대중지성의 얘기는 한갓 신비주의에 불과하게 된다.
이 새로운 지성의 출현 조건으로 종종 거론되는 것이 바로 '네트워크'의 속성이다. 가량 마셜 맥루한의 뒤를 이어 캐나다 토론토 학파를 이끄는 데릭 데 케르코베는 컴퓨터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순간 개별 컴퓨터를 뛰어넘는 수행능력을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그리드' 시스템을 생각해 보자. 개별 PC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거대한 슈퍼컴퓨터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재정이 부족한 연구소에서는 종종 이 방법을 이용해 연구에 필요한 복잡한 연산을 수행해 낸다. 보잘 것 없는 PC도 서로 연결되면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개별 PC들의 접속은 그저 하나의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이룰 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과연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들이 그 어떤 컴퓨터라도 뛰어넘는 특질을 가질 수 있는가? 따지고 들면 아주 복잡한 얘기지만,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결론이 '유니버설 튜링 머신'(UTM)과 관계가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이 관념에 따르면, 유니버설 튜링 머신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그 어떤 개별 튜링 머신이 하는 일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식으로 디자인된 계산기라도 결국은 하나의 튜링 머신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문화평론가ㆍ중앙대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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